https://www.youtube.com/watch?v=c3-2fivBKR0
[On seeing his son, Peter, perform about his life - 아들 Peter가 자신의 인생에 대해 공연하는 것을 보고]
I enjoyed it, but it started off the performance with my report card from just about the middle of junior high school in Washington, and from there it gets better.
저는 그것을 즐겼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워싱턴에 있는 중학교 중반 즈음의 제 성적표로 시작했고, 그 이후로는 점점 더 좋아졌습니다.
We started at the low point, or Peter did, and he changes a little every time I watch, and one time out in Los Angeles I performed with him.
우리는 낮은 지점에서 시작했는데, 피터가 그랬고, 저는 그를 볼 때마다 그가 조금씩 변하는 것을 봅니다. 한 번은 로스앤젤레스에서 그와 함께 공연을 했습니다.
I had my ukulele with me, and for some reason he hasn't asked me back to do that, but I look forward to attending any of his performances.
저는 제 우쿨렐레를 가지고 있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는 저를 다시 불러주지 않았지만, 그의 공연을 보는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His sense of social consciousness - 그의 사회적 의식]
Well, I probably developed a great many of my ideas from my dad.
저는 아마도 많은 아이디어를 아버지로부터 얻었을 것입니다.
All three of his children just loved him unconditionally as he loved us, and he was not a preacher to us in any way,
그의 세 자녀 모두 그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했으며, 그 역시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했습니다.
shape, or form, but we picked up things from a little bit of what he said, but mostly how he acted,
그는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든 설교를 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의 말보다는 주로 그의 행동에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and the idea that all eyes have equal value is something that I think both of my sisters, as well as I felt since I can remember,
모든 사람의 눈이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는 생각은 제 두 자매와 제가 어릴 때부터 느꼈던 것입니다.
I talk sometimes about the O'Varian Lottery, and the truth is that I'm here in my position as a matter of luck.
저는 가끔 '난소 복권(O'Varian Lottery)'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사실 제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운에 의한 것입니다.
I mean, that was the most important thing that happened to me was the woman from which I came, the parents I had, the wiring I had, and I didn't have anything to do with that.
제 말은, 제게 일어난 가장 중요한 일은 제가 태어난 여성, 즉 제 부모님, 그리고 제가 가진 타고난 성향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들에 대해 아무런 선택권이 없었습니다.
[Omaha and segreation during his childhood - 그의 어린 시절 오마하와 인종 차별]
My dad talked at the dinner table about that famous lynching that took place.
아버지는 저녁 식사 자리에서 그 유명한 린칭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It was around 1920, plus or minus a couple of years, and my dad went down and saw a mob out of control.
그것은 1920년 전후로 일어났으며, 아버지는 통제 불능의 군중을 보러 내려갔습니다.
There was a very famous editorial written in the Alma World Herald, subsequently, may have won a Pulitzer, I'm not sure, about mob rule,
이후 '알마 월드 헤럴드(Alma World Herald)'에 군중 지배에 관한 매우 유명한 사설이 실렸고, 아마 퓰리처상을 수상했을 것입니다.
and my dad would talk to all of us at the dinner table about what happens when mob thinking takes over.
아버지는 저녁 식사 자리에서 군중 심리가 지배할 때 일어나는 일에 대해 우리 모두에게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It obviously applied in that lynching, but it applied from the other places, too.
그것은 분명히 그 린칭 사건에 적용되었지만, 다른 곳에서도 적용되었습니다.
I didn't really have memories of segregation in Omaha, but when we moved to Washington, I went to Alice Deal Junior High School,
오마하에서의 인종 차별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지만, 우리가 워싱턴으로 이사했을 때, 저는 앨리스 딜 중학교에 다녔습니다.
and just a few blocks, maybe less than that, away there was a school for black children.
그리고 그곳에서 불과 몇 블록 떨어진 곳에 흑인 아이들을 위한 학교가 있었습니다.
I had some good friends there, actually, who were black, one of the paper boys I used to associate with, and I caddied at the Chevy Chase Country Club.
사실 저는 그곳에 몇몇 좋은 흑인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어울리던 신문배달원 중 한 명이었죠. 그리고 저는 체비 체이스 컨트리 클럽에서 캐디로 일했습니다.
I was the only white caddy there. I wasn't worth beating up, fortunately.
저는 그곳에서 유일한 백인 캐디였습니다. 다행히도 저는 구타당할 만한 가치가 없었습니다.
If there had been more of us, I think there had been more trouble.
만약 우리(백인 캐디들)가 더 많았다면, 아마도 더 많은 문제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I saw what was going on. I saw a little bit in Fredericksburg, Virginia, too,
저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았습니다. 프레더릭스버그, 버지니아에서도 약간 보았습니다.
in the movie theater there, the black sat in a different section than whites, so it never made sense to me.
그곳 영화관에서는 흑인들이 백인들과 다른 구역에 앉았는데, 그것은 제게 전혀 이치에 맞지 않았습니다.
[Fair housing in Omaha - 오마하의 공정 주거]
I helped a bit when that was in the 60s, when there was fair housing legislation in Lincoln.
60년대에 링컨에서 공정주거법이 제정되었을 때 저도 조금 도왔습니다.
My wife was more active than I was, though. She constantly worked.
제 아내가 저보다 더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녀는 끊임없이 활동했죠.
There was a group she worked with where there was a dew and a black, and she was the wasp,
그녀가 함께 일했던 그룹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유대인과 흑인, 그리고 그녀 자신(WASP: 백인 앵글로색슨계 개신교도)이 있었습니다.
and they went around and made presentations at various clubs and that sort of thing.
그들은 여러 클럽과 그런 곳들을 돌아다니며 발표를 했습니다.
She was more active than I was, but I was 100% with her mentally.
제 아내가 저보다 더 활발히 활동했지만, 저는 정신적으로 100% 그녀를 지지했습니다.
I was just working a little more on my own investments.
저는 단지 제 개인 투자에 조금 더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That was an incident at the end of the 1960s, where I was going to join an all-Jewish country club.
1960년대 말에 있었던 사건인데, 제가 유대인 전용 컨트리 클럽에 가입하려고 했습니다.
That created quite a ruckus there for a couple of months. After it took place, everything straightened out.
그것은 몇 달 동안 꽤 큰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후, 모든 것이 정리되었습니다.
The club that I belonged to that had turned down a Jewish friend of mine, which made me quite irritated, and was the cause for me to join the Jewish club.
제가 속해 있던 클럽이 제 유대인 친구를 거절했는데, 그것이 저를 매우 화나게 했고, 그래서 유대인 클럽에 가입하게 된 원인이었습니다.
What existed in whatever it was, 1969, a few years later, just changed dramatically in that respect.
1969년이었는지 몇 년 후에 상황이 극적으로 변했습니다.
I remember one Bob Gibson, who was the terrific baseball player,
저는 훌륭한 야구 선수였던 밥 깁슨을 기억합니다.
and they had something in all-mall called the Xarban Ball, which was a very, very big deal in the past.
그리고 그들은 과거에 매우 중요한 행사였던 Xarban Ball이라는 것을 모든 쇼핑몰에서 열었습니다.
Still is a big deal, but it was a much bigger deal then.
여전히 중요한 행사이지만, 그 당시에는 훨씬 더 큰 행사였습니다.
Eight or ten thousand people would gather at the Xarban Auditorium for something of a civic nature and social nature.
8천에서 1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시민적, 사회적 성격의 행사를 위해 Xarban 강당에 모였습니다.
There wasn't a blackface there. Finally, they invited Bob's one or two of his daughters to participate.
거기에는 흑인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밥(Bob Gibson)의 딸 한두 명을 참여하도록 초대했습니다.
That was a big event. That was a big change in the mid-70s.
그것은 큰 사건이었습니다. 70년대 중반에 일어난 큰 변화였죠.
There's been a lot of progress that's still needed, but I've seen progress take place in my lifetime, probably more with females than with blacks.
아직도 많은 진전이 필요하지만, 제 평생 동안 진전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마도 흑인들보다는 여성들에게 더 많은 진전이 있었을 겁니다.
I've seen anti-Semitism drop dramatically in all-mall.
오마하에서 반유대주의가 극적으로 줄어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Now, maybe people just don't talk to me when they feel that way now, but I was a member of the Rotary Club in the 1960s.
지금은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제게 말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지만, 저는 1960년대에 로타리 클럽 회원이었습니다.
Finally, they put me on some secret membership committee, and I learned what some of the people on that committee thought about how they made selections.
마침내 그들은 저를 비밀 회원 위원회에 배치했고, 그 위원회의 일부 사람들이 어떻게 선택을 하는지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It was amazing to me that in all-mall Nebraska in the 1960s, people would say, well, we've got enough Jews or something like that.
1960년대 네브래스카 오마하에서 사람들이 "유대인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저에게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His first job out of business school - 그가 경영대학원을 졸업한 후 얻은 첫 직장]
Well, when I got out of business school in Columbia, I had a hero there named Ben Graham who did wonders for me in all kinds of ways in my life.
제가 컬럼비아 경영대학원을 졸업했을 때, 벤 그레이엄이라는 영웅이 있었는데, 그는 제 인생의 여러 면에서 저에게 놀라운 도움을 주었습니다.
But when I got out of school, I said, can I go to work for you for nothing?
학교를 졸업했을 때, 저는 그에게 "무보수로 일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습니다.
I was sort of hoping that if he said yes, he would then decide to pay me.
그가 동의하면 나중에 급여를 주기로 결정할 것이라고 기대했죠.
He told me that his little firm, which only employed about six or seven people, that there was so much prejudice then in Wall Street.
그는 6-7명 정도만 고용한 그의 작은 회사에 대해 말하면서, 당시 월스트리트에 편견이 매우 심했다고 했습니다.
Wall Street was divided then between Jewish firms and Gentile firms.
월스트리트는 당시 유대인 회사와 비유대인 회사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I mean, there were a couple like Kunl, maybe, that were known as Jewish firms, and there would be others that were known totally as Gentile firms.
Kuhn Loeb 같은 몇몇 회사는 유대인 회사로 알려져 있었고, 다른 회사들은 완전히 비유대인 회사로 알려져 있었죠.
Ben said that because that prejudice existed, and he'd experienced it, that he felt that to the extent that they had any employment to offer with six or seven people, that they hired up to that point only Jews.
벤은 그러한 편견이 존재했고 그가 직접 경험했기 때문에, 6-7명의 직원을 고용할 수 있는 상황에서 그 시점까지는 유대인만을 고용했다고 말했습니다.
So I came out to all-mall and sold stocks and said, but I kept pestering them for a while, and a few years later they hired me.
그래서 저는 오마하로 와서 주식을 팔았지만, 계속해서 그들을 귀찮게 했고, 몇 년 후 그들은 저를 고용했습니다.
I was the first Gentile hired.
저는 그곳에 고용된 첫 번째 비유대인이었습니다.
[On hearing Martin Luther King. Jr.speak - On hearing Martin Luther King. Jr.speak]
I remember that speech that Martin Luther King gave, I think it was in the fall of 1967.
마틴 루터 킹이 연설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1967년 가을쯤이었던 것 같아요.
That was one of the most inspiring speeches I've ever heard,
그것은 제가 들어본 가장 영감을 주는 연설 중 하나였습니다.
and I just, maybe in the last, I tried to get a copy for many, many years, and finally, about a year or two ago, a fellow who now runs Morehouse found a copy and sent it to me,
저는 수년간 그 연설문 사본을 구하려고 노력했고, 마침내 1-2년 전에 현재 모어하우스 대학을 운영하는 한 분이 사본을 찾아 저에게 보내주셨습니다.
and when I read it today, I think it's even better than when I heard it.
오늘 그것을 다시 읽어보니 처음 들었을 때보다 더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I mean, it's a remarkable speech.
정말 놀라운 연설이었습니다.
No, I knew about King. I mean, but it was, it was, it was different knowing about King and listening to King.
네, 저는 킹 박사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킹 박사에 대해 아는 것과 그의 연설을 직접 듣는 것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It was, it took me right out of my seat.
그 연설은 저를 자리에서 일어나게 만들었습니다.
My wife was with me, and we both had the same experience.
제 아내도 함께 있었는데, 우리 둘 다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And of course, six months later, it was dead. It was interesting.
그리고 물론, 6개월 후에 그는 돌아가셨습니다. 그것은 흥미로웠습니다.
He, in that speech, he talked about truth forever on the scaffold, wrong forever on the throne, but that scaffold sways the future.
그 연설에서 그는 "진리는 영원히 단두대 위에 있고, 잘못은 영원히 왕좌에 있지만, 그 단두대가 미래를 좌우한다"고 말했습니다.
Well, he was going to be dead in six months, but that scaffold did sway the future.
그는 6개월 후에 돌아가셨지만, 그 단두대는 정말로 미래를 좌우했습니다.
[On being a Democrat in a family of Republicans - 공화당원 가족 속의 민주당원으로서]
The jeans must have gone bad, I guess.
유전자가 나빠졌나 봅니다.
The, I grew up, we couldn't sit around the dinner table.
제가 자랄 때, 우리는 식탁에 앉아있을 수 없었습니다.
They wouldn't, they wouldn't, they wouldn't let me eat my hamburger until we'd, we'd set a few bad things about Roosevelt.
그들은 우리가 루즈벨트에 대해 몇 가지 나쁜 말을 할 때까지 제가 햄버거를 먹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So it was, it was a very Republican household. Of course, my dad got elected as Republican.
그래서 우리 집은 매우 공화당 성향이 강한 가정이었습니다. 물론, 제 아버지는 공화당원으로 선출되셨습니다.
I campaigned for him. My sister campaigned for him.
저는 아버지를 위해 선거운동을 했고, 제 여동생도 아버지를 위해 선거운동을 했습니다.
So I, I even ran for the, as a delegate to the Republican National Convention in 1960
저는 심지어 1960년 공화당 전국대회의 대표로 출마했습니다.
for reasons that were sort of unrelated to the normal political reasons.
그 이유는 일반적인 정치적 이유와는 좀 달랐죠.
I waited until after my dad died before I changed my registration.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야 제 등록을 바꿨습니다.
I didn't see any reason to do it, but I changed my ideas and not in one fell swoop, but I changed my ideas in the years preceding 1964 when he died.
그 전에는 바꿀 이유를 못 느꼈지만, 한 번에 확 바뀐 것은 아니었지만, 1964년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몇 년 동안 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I was president of the Young Republican Club at the University of Pennsylvania and was going to ride an elephant down Woodland Avenue of when Dewey won,
저는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청년 공화당 클럽 회장이었고, 듀이가 이겼을 때 우드랜드 애비뉴를 따라 코끼리를 타고 내려갈 계획이었습니다.
but, but there won my moment of fame when, when the Illinois returns came in.
하지만 일리노이 주 개표 결과가 나왔을 때 제 명성의 순간은 사라졌죠.
Civil rights changed, changed my views.
시민권 운동이 제 견해를 바꾸었습니다.
I, I just felt that, that the Democratic on balance, the Democratic neither party carried, carried, carried very much about it there for a while, but, but I felt that the Democratic Party was more likely to do something about it.
저는 민주당이 더 많은 관심을 가질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어느 당도 한동안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민주당이 더 많은 조치를 취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I just struck me as fundamentally wrong that, that almost 200 years after this country was born that, you know, in 1776, Thomas Jefferson wrote, all men are created equal.
저는 이 나라가 생긴 지 거의 200년이 지난 후에도, 1776년에 토머스 제퍼슨이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썼다는 사실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And then when they wrote the Constitution, they all of a sudden decided that no, it was just three-fifths of a person if you were black. I mean, that struck me as kind of crazy.
그리고 나서 그들이 헌법을 작성할 때, 갑자기 흑인은 한 사람의 5분의 3에 불과하다고 결정했습니다. 저에게는 그것이 좀 미친 짓처럼 보였습니다.
And of course, in article two, section one, they, they, they use male pronouns in terms of describing the presidency.
그리고 물론, 헌법 제2조 제1항에서는 대통령을 묘사할 때 남성 대명사를 사용했습니다.
They don't do it with the House of Representatives or the Senate or the judiciary, but they sort of slipped up.
그들은 하원이나 상원, 사법부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지만, 그 부분에서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And, and their true feelings came out in, in, in that article,
그리고 그 기사에서 그들의 진정한 감정이 드러났습니다.
which is really remarkable that it's, it's hymns and he's and all of that sort of thing, 13 years after the,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said otherwise.
독립 선언서가 그렇지 않다고 말한 지 13년이 지난 후에도 정말 놀랍게도 그들은 여전히 남성 대명사와 같은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On Voting for JFK - ]
I voted for JFK, right. I, I, I didn't actively campaign for him. My dad was still alive then.
저는 JFK에게 투표했습니다. 적극적으로 캠페인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때 제 아버지는 아직 살아 계셨습니다.
My sister, my older sister was working very hard for Goldwater.
제 누나, 제 큰 누나는 골드워터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었습니다.
So she started something or worked with it called Gold for Goldwater.
그래서 그녀는 골드워터를 위한 금(Gold for Goldwater)이라는 것을 시작하거나 함께 일했습니다.
So I, I didn't say, I think we'll have two branches of the family nullifying each other.
그래서 제가,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다. 제 생각에 우리는 서로를 무효화하는 가족의 두 갈래를 갖게 될 것 같습니다.
[On Nixon - 닉슨에 대해]
Well, there's an interesting story on President Nixon in the, in 1940,
1940년에 닉슨 대통령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my dad got, got first elected in 1942. And, and then in 1946, the Republicans won control of the House of Representatives for the first time since 1930.
제 아버지는 1942년에 처음 선출되었고, 1946년에는 공화당이 1930년 이후 처음으로 하원 다수당이 되었습니다.
And one night, Joe Martin, who was to become Speaker of the House for the Republicans, came over to our house and told my dad that because of the Republican majority, there was an open house, open seat on the House, on American Activities Committee.
어느 날 밤, 공화당의 하원의장이 될 조 마틴이 우리 집에 와서, 공화당이 다수당이 되었기 때문에 하원 미국 활동 위원회에 공석이 있다고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And he offered it to my dad. And my dad said, no, thanks. He wasn't interested in that seat.
그리고 그는 그 자리를 제 아버지에게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제 아버지는 그 자리에 관심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So then Joe Martin went to a newly elected Congressman named Richard Nixon and offered it to him. And that's the way history develops.
그래서 조 마틴은 새로 선출된 리처드 닉슨 의원에게 가서 그 자리를 제안했습니다. 그렇게 역사가 만들어집니다.
You know, I've always been fascinated by politics and politicians fascinate me.
저는 항상 정치에 매료되어 왔고, 정치인들은 저를 매혹시킵니다.
So Nixon was a very interesting guy. He was a very smart man and, you know, but he's self-destructive.
닉슨은 매우 흥미로운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매우 똑똑한 사람이었지만, 자기 파괴적이었죠.
One of the interesting, probably the book I'd really like to read is, is why smart people do dumb things.
제가 정말 읽고 싶은 책 중 하나는 '왜 똑똑한 사람들이 어리석은 일을 하는가'입니다.
I've seen it all my life. I've seen it in finance. I've seen it in politics. I've seen it in marriages, all kinds of things.
저는 평생 그런 모습을 봐왔습니다. 금융계에서도 봤고, 정치에서도 봤고, 결혼 생활에서도 봤고, 모든 종류의 상황에서 봤습니다.
Why smart people do dumb things? Because, you know, Nixon, Nixon destroyed himself.
왜 똑똑한 사람들이 어리석은 일을 할까요? 닉슨의 경우, 그는 스스로를 파괴했습니다.
I was able to purchase Washington.
저는 워싱턴 포스트를 구매할 수 있었습니다.
I owe Nixon a great, a great thank you because I was able to buy Washington Post stock very cheap because Nixon encouraged B.B. Ravoso, I believe, to challenge two licenses for TV stations that the Washington Post had in Florida, Jacksonville and Miami.
저는 닉슨에게 큰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가 B.B. 라보소를 격려해 워싱턴 포스트가 플로리다의 잭슨빌과 마이애미에 가지고 있던 두 TV 방송국 면허에 도전하게 했기 때문에 저는 워싱턴 포스트 주식을 아주 싸게 살 수 있었습니다.
And Washington Post stock took a quick nosedive from about $37 a share down to 16.
워싱턴 포스트 주식은 주당 약 37달러에서 16달러로 급락했습니다.
And even if those two stations had been taken away, the stock was worth many multiples of the price it got to.
그 두 방송국이 빼앗겼다 하더라도, 주식은 그 가격의 몇 배나 가치가 있었습니다.
And they weren't going to take it away anyway.
그리고 어차피 그들은 그것을 빼앗지 않을 것이었습니다.
So President Nixon did me a huge favor financially when he got B.B. to challenge those licenses.
그래서 닉슨 대통령은 B.B.에게 그 면허에 도전하게 함으로써 저에게 재정적으로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On Katharine Graham - 캐서린 그레이엄에 대해]
Well, Katherine Graham was a remarkable woman. I mean, she was the daughter of Eugene Meyer, who was a huge figure in Wall Street in Washington.
캐서린 그레이엄은 정말 놀라운 여성이었습니다. 그녀는 월스트리트와 워싱턴에서 거물이었던 유진 마이어의 딸이었습니다.
I mean, he went, he started in Wall Street with a very small sum and went on to become, he was actually a chairman of the Fed.
그는 월스트리트에서 아주 작은 돈으로 시작해서 결국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이 되었습니다.
He was, I think, the first head of the RFC. I think he may have been the first head of the World Bank. He was a remarkable man.
그는 제 생각에 RFC(Reconstruction Finance Corporation)의 첫 번째 수장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세계은행의 첫 번째 수장이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정말 놀라운 사람이었습니다.
And he had five children. But Katherine Graham ended up being the heir to the Washington Post.
그리고 그는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캐서린 그레이엄이 워싱턴 포스트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Eugene Meyer bought it in the early 30s and it lost money year after year after year until it finally merged with the Times Herald around 1960.
유진 마이어는 1930년대 초에 워싱턴 포스트를 구입했고, 1960년경 타임스 헤럴드와 합병될 때까지 매년 손실을 보았습니다.
But Katherine Graham, she'd been intimidated about her business ability and a lot of other abilities, both by her mother and by her husband.
하지만 캐서린 그레이엄은 어머니와 남편 모두에 의해 그녀의 사업 능력과 다른 많은 능력에 대해 위축되어 있었습니다.
And she had this idea that men were going to be better at business or anything related to it than women.
그리고 그녀는 남성들이 여성들보다 사업이나 그와 관련된 일에서 더 뛰어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But she also had an inner strength that so when her husband died and she had the responsibility for either taking over the paper or just sitting back and collecting dividends from it,
하지만 그녀는 내면의 강인함도 가지고 있어서 남편이 사망하고 신문사를 인수하거나 단순히 배당금만 받으며 뒤로 물러설 책임이 그녀에게 주어졌을 때,
she gritted her teeth and stopped her knees from at least knocking so people could hear them
그녀는 이를 악물고 적어도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떨리는 무릎을 진정시켰습니다.
and said, you know, she was going to take on the job of running the Washington Post Company.
그리고 그녀는 워싱턴 포스트 컴퍼니를 경영하는 일을 맡겠다고 말했습니다.
And she backed Ben Bradley, the editor of the Post, in the Watergate scandal at a time when politicians were opposing or other news organizations were not picking up on it.
그리고 그녀는 정치인들이 반대하거나 다른 뉴스 조직들이 이를 다루지 않을 때 워터게이트 스캔들에서 워싱턴 포스트의 편집장인 벤 브래들리를 지지했습니다.
The Washington Post was out there all by itself.
워싱턴 포스트는 그때 혼자서 그 일을 해냈습니다.
And, you know, it changed the world, that piece of journalism.
그리고 그 저널리즘 작품은 세상을 바꾸었습니다.
She'd earlier done the same thing, actually, with the Pentagon Papers a couple years earlier in 1971, when Daniel Ellsberg came to the Post with the papers.
그녀는 1971년에 다니엘 엘즈버그가 펜타곤 페이퍼스를 워싱턴 포스트에 가져왔을 때도 같은 결정을 내렸습니다.
And the New York Times, I think, had them first, but they were stopped from publishing to some extent.
그리고 뉴욕 타임즈가 먼저 펜타곤 페이퍼스를 입수했지만, 출판이 중단되었습니다.
And Katherine Graham Kaye said to Ben Bradley, you know, run the presses.
캐서린 그레이엄이 벤 브래들리에게 '인쇄기를 돌리세요'라고 말했습니다.
[Looking to the future - 미래를 바라보며]
You don't have much choice. If there's a choice between looking to the past and looking to the future, believe me, look to the future,
당신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습니다. 과거를 돌아보는 것과 미래를 바라보는 것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면, 믿으세요, 미래를 바라보십시오.
I've really never been much for beating myself up over mistakes or anything of the sort.
저는 실수나 그런 것들에 대해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There's nothing you can do about it. The only thing you can change is the future.
과거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유일하게 바꿀 수 있는 것은 미래입니다.
And I'm in a business where I'm going to make plenty of mistakes. And that just comes with the territory.
그리고 저는 실수를 많이 할 수밖에 없는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분야의 특성입니다.
And you move forward. Although when Kaye Graham died, I was really hit. That was a terrible time.
그리고 계속 전진합니다. 하지만 캐서린 그레이엄이 사망했을 때, 저는 정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때는 정말 힘든 시기였습니다.
[Anti-elitist - 반엘리트주의자]
That's probably, I never thought of it that way. But I think it's fair to say that I'm anti-illegious.
아마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제가 반엘리트주의자라고 말하는 것이 공정할 것 같습니다.
I don't think people have any business thinking of themselves as elite.
사람들이 자신을 엘리트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I mean, they may have been born with the potential for more IQ, or for that matter, you know, able to kick a football further or dance better than somebody else.
물론 그들이 더 높은 IQ의 잠재력을 가지고 태어났을 수도 있고, 또는 다른 사람보다 축구를 더 잘 차거나 춤을 더 잘 출 수 있는 능력을 가졌을 수도 있습니다.
And they no doubt work to perfect their skills and all of that.
그리고 그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자신의 기술을 완벽하게 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But it really gets back to every human as equal value.
하지만 결국 모든 인간은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는 점으로 돌아갑니다.
And, you know, I could be, I could have been born, well, when I was born in 1930, the odds were probably 40 to one against me being born in the United States.
그리고, 알다시피, 저는 1930년에 태어났을 때 미국에서 태어날 확률이 아마 40분의 1 정도였을 것입니다.
I did win the Ovarian lottery on that first day. And on top of that, I was male.
저는 그 첫날 난소 복권에 당첨된 셈입니다. 게다가 저는 남성이었습니다.
And if I'd been female, my life would have been far, far different.
만약 제가 여성이었다면, 제 인생은 훨씬, 훨씬 달랐을 것입니다.
So put that down as another 50-50 shot. And now the odds are 80 to one against being being born a male in the United States.
그러니 그것을 또 다른 50대 50의 가능성으로 보세요. 그리고 이제 미국에서 남성으로 태어날 확률은 80분의 1입니다.
And it was enormously important in my whole life, the fact that I was born in 1930 as a male in the United States.
제가 1930년에 미국에서 남성으로 태어난 사실은 제 인생 전체에 엄청나게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So to think that that makes me superior than anyone else as a human being is just to me, I can't follow that line of reasoning.
그래서 그것이 나를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게 만든다고 생각하는 것은, 저로서는 그런 논리를 따를 수 없습니다.
[On women's rights - 여성의 권리에 대하여]
Women, it's amazing that, you know, the 19th Amendment was passed in 1920.
여성들에 대해 말하자면, 1920년에 19차 수정헌법이 통과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So we went a very long time before we even got around to codifying that.
우리는 그것을 법제화하기 전까지 매우 오랜 시간을 보냈습니다.
But when I was born in 1930, I had sisters one on each side a couple of years each way.
하지만 제가 1930년에 태어났을 때, 양쪽에 몇 년 차이로 태어난 자매들이 있었습니다.
And they're just as smart as I am. They did not have the same shot in life.
그들은 저만큼 똑똑했지만, 같은 기회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I mean, they were des—without anybody saying it.
즉,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사실상 기회가 없었습니다.
My parents loved us all equally, but they did not have the same expectations for us.
우리 부모님은 우리 모두를 똑같이 사랑하셨지만, 우리에 대한 기대는 같지 않았습니다.
The teachers all felt the same about us in terms of wanting to help us and all of that sort of thing.
선생님들도 우리를 돕고자 하는 마음은 모두에게 똑같았습니다.
But they were delivering messages, you know, without knowing it, that told my sisters that their job was to marry well.
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한 채 제 자매들에게 그들의 임무는 좋은 결혼을 하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습니다.
And if they decided to go to work, they should be the retail clerks or nurses or teachers or, you know, maybe secretaries. And that was it.
그리고 만약 그들이 일을 하기로 결정한다면, 소매점 점원이나 간호사, 교사, 또는 비서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게 전부였습니다.
So you had a half the talent in the United States, half the talent that was told to sort of sit on the sidelines.
그래서 미국의 절반의 재능, 즉 절반의 인재들이 사실상 방관자로 남으라는 말을 들었던 겁니다.
And, you know, it always struck me as totally wrong.
그리고 이는 언제나 제게 완전히 잘못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It made me realize how lucky I was that I was male.
그것은 제가 남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But on the other hand, you can look at the flip side of that and say it's quite encouraging, because if you look at what this country accomplished, only using half of its talent, you know, just think of the potential for the future.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반대의 측면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나라가 재능의 절반만을 사용하고도 이룬 것을 보면, 미래의 잠재력이 얼마나 큰지 생각해볼 수 있어 꽤 고무적입니다.
I'm enormously bullish on America over the future.
저는 미국의 미래에 대해 매우 낙관적입니다.
And part of the reason is that we, by some rather stupid decisions, that probably weren't even thought out that much.
그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꽤 어리석은 결정들을 내렸기 때문인데, 아마도 그다지 깊이 생각하지 않고 내린 결정들이었을 겁니다.
We were sort of inherited from thousands of years of male behavior.
우리는 수천 년간 이어져 온 남성 중심적 행동을 물려받았습니다.
But we essentially put half our talent on the sidelines.
하지만 우리는 본질적으로 우리 재능의 절반을 방관자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And we're making a lot of progress on that now, but we've got a ways to go.
지금 우리는 이 부분에서 많은 진전을 이루고 있지만, 아직 갈 길이 멉니다.
It really doesn't make any difference to me, except for the fact that since I feel that women have gotten the short end of the stick for a long time, that if it's a 50-50 choice, I'd rather give the opportunity to the woman.
그것은 제게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여성들이 오랫동안 불리한 입장에 있었다고 느끼기 때문에, 50대 50의 선택 상황이라면 여성에게 기회를 주고 싶습니다.
[Associate yourself with the best people - 최고의 사람들과 어울리세요.]
I think that I'm lucky enough in life, I know I'm lucky enough in life, to be able to associate pretty much with whom I want to in business or socially or wherever.
저는 인생에서 충분히 운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사업이든, 사회적으로든, 어디서든 제가 원하는 사람들과 거의 자유롭게 교류할 수 있을 만큼 운이 좋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And I think it's sort of crazy.
그리고 저는 이것이 약간 미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I think the ideal thing is to focus with people that are better than you are, because you will move in the direction of the people you associate with.
이상적인 것은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들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함께 어울리는 사람들의 방향으로 움직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And I advise students all the time, you know, marry up, marry somebody. It can't be done mathematically if everybody tries to do it.
저는 항상 학생들에게 조언합니다. 더 나은 사람과 결혼하라고요. 물론 모든 사람이 이렇게 하려고 하면 수학적으로 불가능합니다.
But your behavior will move in the direction of the people you associate with.
하지만 여러분의 행동은 함께 어울리는 사람들의 방향으로 움직일 것입니다.
And so why not associate with the best? I mean, I've had a number of heroes in life, and associating with them has done wonders for me.
그렇다면 왜 최고의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겠습니까? 저는 인생에서 여러 영웅들을 만났고, 그들과 어울린 것이 저에게 놀라운 변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I wouldn't have been the same person. I would not have had the same fun in life if I'd been indiscriminate in terms of who I associate with over time.
만약 제가 시간이 지나면서 함께 어울리는 사람들을 무분별하게 선택했다면, 지금의 저와 같은 사람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같은 즐거움을 인생에서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Warren's heroes - 워렌의 영웅들]
Well, you can start with my heroes. You start with my dad, you know.
제 영웅들부터 시작할 수 있겠죠. 우선 제 아버지로 시작합니다.
You move on to Ben Graham, you move on to my partner Charlie Munger. Kay Graham was definitely a hero of mine.
그 다음 벤 그레이엄으로 이어지고, 제 파트너인 찰리 멍거로 이어집니다. 캐서린 그레이엄도 확실히 제 영웅 중 한 명이었습니다.
My wives have been heroes in both cases. They've all done wonders for me.
제 아내들은 두 경우 모두에서 영웅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저에게 놀라운 일을 해주었습니다.
And basically not expected anything in return.
그리고 기본적으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I mean, I have these friends that they do 10 things for me, and they're thinking about doing the 11th rather than whether they're going to get one in return for me and from me.
제 친구들은 저를 위해 10가지를 해주고, 11번째를 할 생각을 하며, 제가 그들에게 무언가를 돌려줄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습니다.
And I've been lucky in life that I've never had a hero that's let me down.
저는 인생에서 운이 좋게도 저를 실망시킨 영웅을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That would be a terrible experience to really have your belief in somebody that you sort of worshipped shattered, and it's never happened to me.
정말로 존경하고 숭배하던 사람에 대한 믿음이 깨지는 것은 끔찍한 경험일 것입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On loyalty - 충성에 대하여]
Well, Loyalty and yeah, my partner Charlie Munger in business, for example, we don't keep score, you know, who's done the most work or anything of the sort.
충성심과, 예를 들어, 제 사업 파트너인 찰리 멍거와의 관계에서도 우리는 누가 가장 많은 일을 했는지 점수를 매기지 않습니다.
And in a marriage, that's important.
결혼에서도 그것이 중요합니다.
I mean it, but it's, I literally, I had a fellow named Rorimer Davidson at Geico was who spent four hours with me in a January day in 1951. He changed my life.
저는 진심입니다. 1951년 1월 어느 날, GEICO의 로리머 데이비슨이라는 사람이 저와 네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는 제 인생을 바꾸었습니다.
He had no expectation he was going to get a thing from me, but I came there on a Saturday and banged on the door of what was then called government employees insurance, now called Geico.
그는 저에게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저는 토요일에 그곳에 가서 당시 정부 직원 보험이라고 불리던 GEICO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And a janitor finally let me in, and he was the only one in the office that's Rorimer Davidson.
결국, 청소부가 저를 들어오게 했고, 사무실에 유일하게 있던 사람이 바로 로리머 데이비슨이었습니다.
And he spent four hours with me giving me an education that literally did change my life.
그는 저에게 네 시간을 할애해 교육을 해주었고, 그것이 제 인생을 바꾸었습니다.
And you're very, very fortunate in life when you run into people like that. Ben Graham, I mean, he never asked anything of me.
인생에서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정말 행운입니다. 벤 그레이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저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I mean, he just basically gave, I mean, he was, he taught for 25 years or so at Columbia. And he was creating future competitors.
그는 25년 동안 컬럼비아 대학에서 가르쳤고, 미래의 경쟁자들을 양성하고 있었습니다.
I mean, I'm sure he didn't, if he took any money for it, he gave it right back to the school.
만약 그가 돈을 받았다면, 그것을 학교에 돌려주었을 것입니다.
But he just, he basically was, somebody said he was planting trees that other people would sit under.
그는 단지 다른 사람들이 그늘에서 쉴 수 있는 나무를 심고 있었습니다.
And I've had a number of them like that. It's been wonderful.
그런 사람들을 여러 명 만날 수 있어서 정말 좋았습니다.
[Passing on wisdom to the next generation - 다음 세대에 지혜를 전수하기]
Well, I like teaching. So it's a little unfair. It's like I make any sacrifice when I do it.
저는 가르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조금 불공평한 면이 있습니다. 제가 할 때 희생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I'm still at 84. I've got 40 schools that will come out this school year from all over, including outside the country.
저는 84세이고, 이번 학년도에 전 세계에서 온 40개의 학교가 저를 찾아올 것입니다.
I have one school from Brazil that comes and another one came from China a week or so ago. I had Harvard, but at the same time I had Western Ontario.
브라질에서 온 학교 하나와 일주일 전 중국에서 온 학교 하나가 있습니다. 하버드도 있었고, 동시에 웨스턴 온타리오도 있었습니다.
And so I enjoy, but I enjoy it.
저는 이 일을 즐깁니다.
And at the start of every year, I kind of feel, I'm not sure what I want to do this again. As soon as I start talking to the students, I get energized because it's so much fun.
매년 시작할 때마다, 다시 할지 잘 모르겠다고 느끼지만, 학생들과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에너지가 생깁니다. 그건 정말 재미있거든요.
Just looking at a bunch of people who got their futures ahead of them, they're forming ideas, they're forming behavior patterns, and they're eager to learn and they come a thousand miles or 1500 miles to talk.
미래가 있는 많은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 그들이 아이디어를 형성하고 행동 패턴을 만드는 모습, 배우고 싶어하는 열망을 가지고 1,000마일 또는 1,500마일을 여행해 오는 모습을 보는 것은 정말 즐겁습니다.
And I probably get more out of it than they do.
그리고 아마도 제가 그들보다 더 많은 것을 얻을 것입니다.
I let them ask any question they want to ask. I tell them, they throw them at my head.
저는 그들이 원하는 어떤 질문이든 물어보게 합니다. 그들에게 제 머리로 던지라고 말합니다.
It'll be much more fun for me than if you deliver up softball.
그렇게 하면 소프트볼을 던지는 것보다 훨씬 더 재미있을 것입니다.
So we can talk about investments or business, but we can talk about philanthropy or we can talk about marriage or we can talk about career.
그래서 우리는 투자나 비즈니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지만, 자선 활동, 결혼, 또는 경력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And I remember sometime back, there was a young woman from the University of Chicago and the very first question I got from her was, do you have to be a bitch on wheels to succeed?
기억나는 것은 시카고 대학의 한 젊은 여성이 있었는데, 그녀가 저에게 처음으로 한 질문은 '성공하려면 정말 독해야 하나요?'였습니다.
And I think I convinced her that she didn't. And my guess is she's succeeding now.
그리고 저는 그녀에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설득했습니다. 제 추측으로는 그녀가 지금 성공하고 있을 것입니다.
So you get a lot of good feelings out of teaching. I started when I was 21.
가르침에서 많은 좋은 감정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저는 21살 때 시작했습니다.
[On talking to students - 학생들과의 대화에 대하여]
Well, I really want to talk to students.
저는 정말로 학생들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And if I talk to a bunch of 50 or 60-year-olds, they want two things. They want predictions and to be entertained.
만약 제가 50세나 60세의 사람들과 이야기한다면, 그들은 두 가지를 원합니다. 예측과 재미를 원합니다.
They're not going to change their behavior patterns. It's too late for them.
그들은 행동 패턴을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이미 너무 늦었습니다.
Somebody once said the chains of habit are too light to be felt until they're too heavy to be broken.
누군가가 말하기를, 습관의 사슬은 너무 가벼워서 느껴지지 않다가 너무 무거워져서 깨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And by the time you're saying you're not going to, you know, there's no great change is going to take place.
그리고 당신이 '하지 않겠다'고 말할 때쯤이면, 아시다시피, 큰 변화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But with the students, it actually makes a difference. And I get letters from them telling me how it makes a difference.
하지만 학생들에게는 실제로 차이를 만듭니다. 저는 그들에게서 편지를 받으며 그것이 어떻게 차이를 만드는지 듣습니다.
It makes a difference maybe in who they marry or how they go into marriage in terms of the discussions that they have with their proposed spouses, all kinds of things about what they'll do in careers or whatever.
그것은 그들이 누구와 결혼할지, 결혼할 때 어떤 논의를 할지, 경력에서 무엇을 할지 등 여러 가지에 영향을 미칩니다.
Maybe who knows what comes out of it.
누가 알겠습니까, 어떤 결과가 나올지.
But I do know, because I hear from them, I do know that it changes their lives in some way.
하지만 저는 그들에게서 듣기 때문에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든 그들의 삶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And I have a good time too.
그리고 저도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The side people don't see -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측면]
Well, the toughest thing I have to do is if I have to fire a manager. And we have no retirement age at Berkshire.
가장 어려운 일은 매니저를 해고해야 할 때입니다. 버크셔 해서웨이에는 정년이 없습니다.
So it isn't like at 65, I can say, you know, you're just terrific, but we've got this rule.
그래서 65세에 '당신은 정말 훌륭하지만, 우리는 이런 규칙이 있어요'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So when I tell somebody it's time for them to leave, they know I'm making a decision about them.
그래서 제가 누군가에게 떠날 때가 되었다고 말할 때, 그들은 제가 그들에 대해 결정을 내리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And these people are my friends. And I do it myself.
그리고 이 사람들은 제 친구들입니다. 저는 직접 그렇게 합니다.
In most cases, not all cases, but most cases, certainly if they're friends of mine, I do it.
모든 경우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경우, 특히 그들이 제 친구라면 저는 그렇게 합니다.
And most of them are, I do it myself.
그리고 그들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저는 직접 그렇게 합니다.
And I would give a lot of money not to have to do that sort of thing, but that is my job.
저는 그런 일을 하지 않기 위해 많은 돈을 줄 수 있지만, 그것이 제 직업입니다.
And capitalism at time can be very tough. And the market system can. It's a wonderful system.
때때로 자본주의는 매우 힘들 수 있습니다. 시장 시스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훌륭한 시스템입니다.
And it produces way more goods and services that people want than any other system will.
그리고 그것은 사람들이 원하는 상품과 서비스를 어떤 다른 시스템보다 훨씬 더 많이 생산합니다.
But with given individuals, given industries, given companies, it can be brutal.
하지만 특정 개인, 특정 산업, 특정 회사에 대해서는 잔혹할 수 있습니다.
And it's up to me to have the right person running a business.
그리고 사업을 운영할 적합한 사람을 선택하는 것은 제 책임입니다.
And sometimes that right person runs out of gas for one reason or another.
때때로 그 적합한 사람이 어떤 이유로든 지치게 됩니다.
Sometimes, I mean, I've had cases of Alzheimer's and other debilitating situations.
때로는, 알츠하이머나 다른 쇠약해지는 상황을 겪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And I get on a plane and fly in one way or another, tell them that their time is up.
그래서 저는 비행기를 타고 가서 어떤 식으로든 그들에게 그들의 시간이 끝났다고 말합니다.
And it's, they usually get, at the end, they're consoling me, usually, because I feel so terrible about it.
그리고 보통, 결국에는 그들이 저를 위로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제가 그것에 대해 너무 끔찍하게 느끼기 때문입니다.
But, you know, it's not pleasant. But you have to make other tough decisions. There's no question about it.
알다시피, 그것은 즐겁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어려운 결정들도 내려야 합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It's painful. And it'll always be painful. And on the other hand, I have to do it.
그것은 고통스럽습니다. 항상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그것을 해야 합니다.
And somebody will have to come and tell me. But I'll understand what they're going through.
그리고 누군가는 와서 저에게 말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들이 겪고 있는 일을 이해할 것입니다.
I tell my kids, you know, tell me when I'm going Gaga. But all three of you better come in, because it's just one of you. You're out of the will.
저는 제 아이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정신이 오락가락할 때 말해줘.' 하지만 너희 셋 모두가 와야 해. 왜냐하면 한 명만 오면, 유언장에서 제외될 거야.
[His inner voice - 그의 내면의 목소리]
Oh, I think it's largely a blessing. I mean, that is, that is when you, you know, that's when you're making decisions.
저는 그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말은, 그러니까, 당신이 결정을 내릴 때 말이죠.
I mean, I like to sit and think. And I spend a lot of time doing that.
저는 앉아서 생각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 일을 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And sometimes it's pretty unproductive. But I find it enjoyable to think about, particularly about business or investment problems.
때때로 그것은 꽤 비생산적일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특히 사업이나 투자 문제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즐깁니다.
They're easy. It's the human problems that are the tough ones.
그것들은 쉽습니다. 인간 문제들이 더 어려운 것들입니다.
Sometimes there aren't any good answers with human problems. There's almost always a good answer with money.
때로는 인간 문제에는 좋은 답이 없을 때도 있습니다. 돈 문제에는 거의 항상 좋은 답이 있습니다.
[How Warren measures success - How Warren measures success]
Well, I think somebody, I think for most people, it's a pretty good,
글쎄요, 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꽤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remember, I think it was Bertrand Russell's words, although I tried to look it up one time and I couldn't find him.
기억하세요, 저는 그것이 버트런드 러셀의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 번 찾아보려고 했을 때 찾을 수 없었습니다.
But he said that success is getting what you want and happiness is wanting what you get.
그는 성공이란 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고, 행복이란 당신이 얻은 것을 원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And I would say the best measure of success for many people comes from a story that was a woman here in Omaha,
그리고 저는 많은 사람들에게 성공의 가장 좋은 척도는 오마하에 있던 한 여성의 이야기에서 나온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a Polish Jew, who went into concentration camp during the war,
그 여성은 폴란드계 유대인으로, 전쟁 중에 강제수용소에 들어갔습니다.
went into a German operation where some of her family went in with her and she was in one line and her sister was in another line and they didn't all come out.
그녀는 독일의 작전에 휘말려 가족과 함께 들어갔는데, 그녀와 그녀의 자매는 다른 줄에 서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가 살아나오지는 못했습니다.
I mean, she went through terrible times. And when she was maybe 80, so I probably would have been 70, she said to me one day,
그녀는 정말 끔찍한 시간을 겪었죠. 그리고 그녀가 80세쯤 되었을 때, 아마 제가 70세쯤 되었을 때, 그녀가 어느 날 저에게 말했습니다.
she said, Warren, she said, I'm very slow to make friends.
"워렌," 그녀가 말했습니다. "저는 친구를 사귀는 데 매우 신중해요."
Because when I look at somebody, I say to myself, would they hide me?
왜냐하면 제가 누군가를 볼 때, 저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이 사람이 나를 숨겨줄까?'라고요."
And I would say that if you get to be 65 or 70 or 80, and you've got a lot of people that would hide you, you're a success.
그리고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만약 당신이 65세나 70세 또는 80세가 되었을 때, 당신을 숨겨줄 사람들이 많다면, 당신은 성공한 것입니다
And it's pretty another way of saying a lot of people who really love you.
그리고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정말로 당신을 사랑한다는 또 다른 표현입니다.
And I would say that if you get to be that age and people are holding testimonial dinners for you, write them a check or naming business schools after whatever it may be, and nobody will hide you, I think you're a failure.
그리고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만약 당신이 그 나이가 되어서 사람들이 당신을 위해 축하 만찬을 열거나, 당신에게 수표를 써주거나, 당신의 이름을 따서 경영대학을 명명하는 등의 일을 하지만, 아무도 당신을 숨겨주지 않을 것이라면, 저는 그것이 실패라고 생각합니다.
And I know plenty of very wealthy people that their own kids wouldn't hide them.
저는 자신의 자녀들조차 숨겨주지 않을 매우 부유한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So I think if you're looking for one measure of success, just say to yourself,
그래서 저는 성공의 한 가지 척도를 찾고 있다면, 그저 자신에게 물어보세요.
how many people would hide me?
'나를 숨겨줄 사람이 얼마나 될까?'
And there's a lot of people that never accumulated a lot of money or anything, but there's all kinds of people that would do anything for them.
많은 돈이나 다른 것을 축적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을 위해 무엇이든 해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And I feel that way about some people and have felt that way.
그리고 저는 어떤 사람들에 대해 그렇게 느끼고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And you know your success then.
그리고 그때 당신은 자신의 성공을 알게 됩니다.
[He doesn't fear death -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No, I don't. I used to, when I was about 10 years old, I used to think about it a lot, but now I've had a terrific life.
아니요,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10살쯤 되었을 때는 그것에 대해 많이 생각했지만, 지금은 훌륭한 삶을 살았다고 느낍니다.
I feel, you know, it's going to happen.
당신도 알다시피, 그것은 일어날 것입니다.
And I have no idea what happens after it. I'm an agnostic.
그리고 그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전혀 모릅니다. 저는 불가지론자입니다.
So, you know, it may be terribly interesting. It may not be interesting at all,
그래서, 아시다시피, 매우 흥미로울 수도 있습니다. 전혀 흥미롭지 않을 수도 있죠,
we'll find out. But your body gets kind of tired after a while. Mine isn't quite there yet.
우리는 알게 될 겁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몸이 점점 피곤해집니다. 제 몸은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But I think in another 20 years, I'm not sure I would want a lot more days after that.
하지만 20년 후에는 그 이후로 더 많은 날들을 원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I am having, you know, I'm having as good a time as 84s I've ever had.
아시다시피, 저는 지금 84세에 제가 지금까지 가졌던 것만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But my body can't do the same things now that it could before.
하지만 제 몸은 이전처럼 같은 일을 할 수 없습니다.
But fortunately, it doesn't make any difference in my activities.
다행히도, 그것이 제 활동에 큰 차이를 만들지는 않습니다.
Someday it'll make a difference.
언젠가는 차이가 생길 겁니다.
And I don't, I would not want to stick around in a paralyzed state or not.
그리고 저는, 마비 상태로 계속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I mean, just take, you know, Joe Kennedy, for example. I would not want to exist that way.
그러니까, 예를 들어 조 케네디를 생각해 보세요. 저는 그런 식으로 존재하고 싶지 않습니다.
So, I do not want to survive just to survive.
그래서 저는 단순히 생존하기 위해 생존하고 싶지 않습니다.
And I've told my kids and my wife that, you know, just don't keep me alive.
그리고 저는 제 아이들과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저를 그저 살려두지 말라고요.
Just keep a heart beating. Keep me alive as long as I'm enjoying life.
단순히 심장을 뛰게 하지 말라고요. 제가 삶을 즐기는 한 저를 살려두세요.
[On aging - 노화에 대하여]
Well, physically, you know, I'm pretty well depreciated. I'm getting down to salvage value.
글쎄요, 육체적으로는 제가 꽤 많이 낡았죠. 저는 이제 잔존가치 수준까지 내려가고 있습니다.
But it doesn't really make any difference. I mean, I don't need hand-eye coordination. I don't, you know, I don't need, I don't need balance particularly or strength.
하지만 그것은 실제로 큰 차이를 만들지 않습니다. 제 말은, 저는 손과 눈의 협응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특별히 균형 감각이나 힘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Like, and so I'm not as strong as I was five years ago.
그러니까, 저는 5년 전만큼 강하지 않습니다.
I can't, I've gone out to do it, but I probably had a golf ball, you know, at best half the distance I could have hit 10 years ago.
제가 해보려고 했지만, 아마도 10년 전만큼 골프공을 멀리 칠 수는 없을 겁니다. 최선의 경우에도 절반 거리 정도일 겁니다.
But it really doesn't make any difference at all. It doesn't interfere with my work.
하지만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제 일에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It doesn't interfere with my happiness. It doesn't interfere with my thinking. It doesn't interfere with my friends.
제 행복에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제 생각에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제 친구들과의 관계에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So, I literally can say at 84, I may not be able to say it, you know, a few more years,
그래서 저는 84세에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몇 년 후에는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but I can say at 84 that I, the fact that my body isn't the same as it was earlier, wasn't that great to start with.
하지만 저는 84세에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제 몸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사실은, 처음부터 그렇게 대단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You know, you're not looking at some guy that was, you know, was a candidate for the Heisman or anything in the past.
아시다시피, 여러분은 과거에 하이즈만 트로피 후보였던 사람을 보고 있는 게 아닙니다.
So, I don't feel any diminution in my enjoyment of life or enthusiasm for life at all to this point.
그래서 저는 지금까지 삶의 즐거움이나 열정이 조금도 줄어들었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In fact, in a sense, the game gets, that I'm in, gets more interesting all the time.
사실, 어떤 면에서는 제가 하고 있는 게임이 점점 더 흥미로워지고 있습니다.
My, it's tough. One part about growing old that's particularly tough is you lose more of your friends. I mean, that is, and that is tough.
나이 들어가는 것은 힘듭니다. 나이 들어가면서 특히 힘든 점은 더 많은 친구들을 잃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I just lost one last week and Keoh, who's a wonderful friend,
저는 지난주에 훌륭한 친구인 Keoh를 잃었습니다.
but aside from that, and that's important, but aside from that, I wake up every morning as excited about the day that's coming as I ever have in my life.
그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저는 매일 아침 제 인생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다가오는 하루에 대해 흥분하며 일어납니다.
[His mind is still sharp - 그의 정신은 여전히 날카롭다.]
I would not do as well on an IQ test as I would have 50 years ago. I can't, I can do mental arithmetic still pretty well, but not as good as I could when I was in my 20s or 30s.
저는 50년 전만큼 IQ 테스트를 잘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저는 여전히 암산을 꽤 잘 하지만, 20대나 30대 때만큼 잘하지는 못합니다.
I, I, I read faster when I was younger.
저는 젊었을 때 더 빨리 읽었습니다.
I could, I, my memory is still pretty good for business facts and that sort of thing.
저는, 제 기억력은 여전히 비즈니스 사실들과 그런 종류의 것들에 대해서는 꽤 좋습니다.
But if I'd read a book when I was 25, I'd remember it better than if I read a book now.
하지만 제가 25살 때 책을 읽었다면, 지금 책을 읽는 것보다 더 잘 기억할 것입니다.
On the other hand, I've learned more about people over the years.
반면에, 저는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에 대해 더 많이 배웠습니다.
So, so I have, I'm better actually at things that involve people judgments than I would have been when I was in my 20s.
그래서 저는 실제로 20대 때보다 사람을 판단하는 것과 관련된 일들을 더 잘합니다.
But, but in terms of learning a new game, I wouldn't learn it as fast now.
하지만, 새로운 게임을 배우는 면에서는, 지금은 예전만큼 빨리 배우지 못할 것입니다.
It used to be a game called Simon that you, that you press various buttons and things out.
예전에 사이먼이라는 게임이 있었는데, 여러 버튼을 누르고 하는 그런 게임이었죠.
Well, I was pretty good at that 40 years ago.
글쎄요, 저는 40년 전에 그 게임을 꽤 잘했습니다.
If I took that up now and spent the same amount of time practicing on it, I wouldn't be nearly as good.
만약 지금 그 게임을 시작해서 같은 시간 동안 연습한다면, 예전만큼 잘하지는 못할 겁니다.
[Human behavior - 인간 행동]
I've learned all kinds of things about human behavior.
저는 인간의 행동에 대해 온갖 종류의 것들을 배웠습니다.
It's very hard to describe all the various aspects of it, but I have seen, you know, when I was 20, I hadn't seen that much of human behavior,
그것의 다양한 측면을 모두 설명하기는 매우 어렵지만, 제가 20살 때는 인간의 행동을 그렇게 많이 보지 못했습니다.
but, but now I've experienced a lot, particularly in sort of a specialized field.
하지만 지금은 많은 경험을 했습니다, 특히 어떤 특정 분야에서요.
And, and, so I think, I think I'm quite a bit better in terms of, of, of, particularly with the extremes of human behavior.
그래서 저는 인간 행동의 극단적인 부분에 있어서, 제가 상당히 나아졌다고 생각합니다.
If you give me a hundred people, I can't pick out the best one to run a business that take a hundred graduates of a good business school or something.
만약 당신이 저에게 100명의 사람을 준다면, 저는 그들 중에서 비즈니스를 운영할 최고의 사람을 골라낼 수 없습니다.
I can't pick out the best one,
저는 최고의 한 사람을 골라낼 수는 없지만,
but if I hear from people who are selling a business or associated with some other way, I think I'm reasonably good at, at picking the ones that are predicting how they'll behave after they sell us the business or how they'll behave in other situations in the future.
만약 비즈니스를 판매하는 사람들이나 관련된 사람들로부터 이야기를 들으면, 저는 그들이 우리에게 비즈니스를 판 후에 어떻게 행동할지, 또는 미래의 다른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지를 예측하는 사람들을 선별하는 데 꽤 능숙하다고 생각합니다.
You still make mistakes.
물론 실수를 할 때도 있습니다.
[His focus on work - 그의 일에 대한 집중]
I have no regrets at all that I focused on. I got interested in stocks when I was probably seven or something like that.
제가 중점적으로 다룬 것에 대해 전혀 후회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7살쯤 되었을 때 주식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I got interested in business when I was six or seven.
6살이나 7살 때 비즈니스에 관심을 갖게 되었죠.
And, and, you know, when it would have been better if I'd focused on chess, now Bobby Fisher would have killed me, you know, if I'd focused on golf, you know, be a joke.
그리고, 알다시피, 체스에 집중했다면 더 좋았을 텐데, 바비 피셔가 저를 이겼겠죠. 골프에 집중했다면 우스운 일이 되었겠죠.
So I, I happened to very early on learn, sort of stumble into an area that I wasn't going to be naturally good at.
그래서 저는 아주 일찍 제가 타고난 재능이 없는 분야에 우연히 발을 들이게 되었습니다.
And I was better because I did stumble on to it early, and I was better because I focused on it.
일찍 접하게 되어 더 나았고, 거기에 집중했기 때문에 더 나았습니다.
But, and obviously, if you're going to spend X hours a day on, on some particular activity, you're not going to do it on something else.
하지만, 당연히 하루에 X시간을 특정 활동에 쓴다면, 다른 것에는 그만큼 시간을 쓰지 못하게 됩니다.
But, you know, I never learned to ice skate. I don't miss it at all. There's all kinds of things.
하지만, 저는 스케이트를 배운 적이 없어요. 전혀 아쉽지 않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것들이 있죠.
And you get to pick what you spend your time on. If you're lucky, you get to pick.
여러분은 시간을 어디에 쓸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운이 좋다면 선택할 수 있죠.
And, and, and I've been able to really decide my own calendar for the last 60 years, probably to a degree that almost be hard to top it anyway. And, and I'm glad I made those choices.
그리고 저는 지난 60년 동안 제 일정을 정말로 스스로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거의 최고 수준으로요. 그리고 그런 선택들을 한 것이 기쁩니다.
[Doing what you love to do - 당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는 것]
I get every day, and I've been doing this for decades, I get to work at what I love with people I love.
저는 매일 제가 사랑하는 일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렇게 수십 년 동안 해왔습니다.
You know, if you take my assistant, Debbie Masonic, I mean, there's nobody in the world,
아시다시피, 제 비서 데비 매소닉을 예로 들면, 세상에 그녀보다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은 없어요.
you know, I'd rather work with than her, you know, and, and, and Charlie Munger, my partner, even though he's in Los Angeles,
그리고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제 파트너 찰리 멍거도 마찬가지죠.
there's nobody I'd rather work with than Charlie, the managers we have.
찰리보다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모신 매니저들도 그렇고요.
So I, I get to select the game, sort of how the game is going to be played, and I get to select the people I get, who are going to be on my team.
그래서 저는 어떤 게임을 할지, 그 게임을 어떻게 할지 선택할 수 있고, 제 팀에 누가 들어올지도 선택할 수 있습니다.
And if, if I, if I do, if, if I'm associating with somebody that causes my summer to churn, it's my fault, because I don't have to do it.
만약 제가 누군가와 함께 있어서 제 마음이 불편해진다면, 그건 제 잘못입니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죠.
And I've, I've arranged things that way to quite a degree.
저는 상당 부분 그렇게 일을 조정해왔습니다.
And I'm in a field where I can do that.
그리고 저는 그렇게 할 수 있는 분야에 있습니다.
If I was in government, I wouldn't be able to do it, or politics, or all kinds of things.
만약 제가 정부나 정치, 또는 다른 여러 분야에 있었다면 이렇게 하지 못했을 거예요.
But, but fortunately, I'm in, I consider the sort of ideal game.
하지만, 다행히도 저는 제가 생각하기에 이상적인 게임에 있습니다.
[The importance of quiet time - 조용한 시간의 중요성]
Well, I like things quiet.
저는 조용한 것을 좋아합니다.
I, I, I shut the door, actually, at the office, because I, I don't want to hear anybody talking outside.
사무실에서 실제로 문을 닫아버리는데, 밖에서 누군가 말하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And, and I just, I liked, I liked to read a lot. Can't read as fast as I used to read.
그리고 저는 그냥, 책 읽는 것을 좋아합니다. 예전만큼 빨리 읽지는 못하지만,
But I still probably spend five or six hours a day reading and, and, and, or, or thinking while I read.
아직도 아마 하루에 5-6시간 정도를 읽거나, 읽으면서 생각하는 데 보냅니다.
It's, it's the kind of life I like.
이것이 제가 좋아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Somebody else with a different, different personality might like something much different, but, but I do know what I like, and I've managed to create an environment where I maximize it.
다른 성격을 가진 누군가는 매우 다른 것을 좋아할 수 있겠지만, 저는 제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 있고, 그것을 극대화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왔습니다.
[The way his mind works - 그의 사고 방식]
Well, over the years, you develop a lot of filters. So you don't waste a lot of time on things.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필터를 개발하게 됩니다. 그래서 불필요한 것들에 많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I always worry about sounding rude when people call me about a business, because usually in a minute or two, I can tell whether it's going to make it through all the filters is something I'm interested in.
사람들이 사업에 대해 전화할 때 무례하게 들릴까봐 항상 걱정됩니다. 보통 1-2분 안에 그것이 모든 필터를 통과해서 제가 관심을 가질만한 것인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And I don't like to tell them that because they feel that if I just listen to them for an hour that I'll understand why they like it so well or something of the sort.
그리고 저는 그들에게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들은 제가 한 시간만 들어준다면 왜 그들이 그것을 그렇게 좋아하는지 이해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거나 그런 식으로 느끼기 때문입니다.
So there are these, there are various shortcuts that you get, but I, I probably don't retain, you know, I, I'm retaining a particular set of, or a collection of information, but other people are doing it in different ways.
그래서 이런 다양한 지름길이 있지만, 저는 아마도 특정한 정보의 집합이나 모음을 유지하고 있을 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른 방식으로 하고 있습니다.
I mean, when I was a kid, I could have told you who was the starting lineup for, you know, 16 major league teams, but there were only eight teams in each league and they, and they didn't trade their players around.
어렸을 때는 16개의 메이저 리그 팀의 선발 라인업을 말할 수 있었지만, 그때는 각 리그에 8개 팀만 있었고, 선수들을 자주 트레이드하지 않았습니다.
I can't tell you anybody now, but there are all kinds of people that can.
지금은 아무도 말할 수 없지만, 여전히 그런 것을 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They're just collecting different information that I'm collecting.
그들은 단지 제가 모으는 것과는 다른 정보를 모으고 있을 뿐입니다.
And, and, and there, there are people that are carrying around absolutely as much information they're had as I am, but I happen to have a pretty well concentrated in a few areas.
그리고 제가 가진 만큼 많은 정보를 갖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지만, 저는 우연히 몇 가지 분야에 꽤 잘 집중하고 있습니다.
And I do know what I call my circle of competence.
그리고 저는 제가 '역량의 원'이라고 부르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So I, I stay within that circle, and I don't worry about things that are outside that circle that other people may be able to capitalize or evaluate.
그래서 저는 그 원 안에 머물며, 다른 사람들이 활용하거나 평가할 수 있는 그 원 밖의 것들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It doesn't bother me that other people have skills that I don't have.
다른 사람들이 제가 가지지 못한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저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His circle of competence - 그의 능력 범위]
Well, my circle of competence, which has grown to some degree, but circle of competence is, is the area in which certain kinds of industries, for example, I can understand the future economics of other kinds of industries.
음, 제 역량의 원은 어느 정도 확장되었지만, 역량의 원이란 특정 종류의 산업 분야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저는 일부 산업의 미래 경제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I can't. And, and I have to, I have to know where that, the perimeter of that circle is.
하지만 다른 종류의 산업은 이해할 수 없죠. 그리고 저는 그 원의 경계가 어디인지 알아야 합니다.
Now, over the years, I may be able to enlarge the circle somewhat, but the circle never gets to be all-encompassing.
세월이 흐르면서 그 원을 어느 정도 확장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원이 모든 것을 포괄하게 되는 일은 절대 없습니다.
And Tom Watson Sr., who built IBM, said, I'm no genius, but I'm smart in spots, and I stay around those spots.
IBM을 세운 톰 왓슨 시니어는 이렇게 말했죠. '나는 천재가 아니지만, 특정 분야에서는 똑똑하고, 그 분야 주변에 머물러 있다.'
Well, he was talking about a circle of competence.
그는 역량의 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던 겁니다.
And I see all of, I, you know, my partner Charlie says, you know, it's wonderful to have a IQ of 180 as long as you don't think it's 200.
제 파트너 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IQ가 180이라는 것은 훌륭하지만, 그것을 200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한에서 말이야.'
And I have seen all kinds of very, very smart people self-destruct one way or another in business or particularly in, in the stock market.
저는 매우 똑똑한 사람들이 사업에서, 특히 주식 시장에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자멸하는 것을 봐왔습니다.
And they, they stray outside of their circle of competence just because they know their, they, they know they're very, very smart, but that doesn't mean they know everything.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매우 똑똑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신의 역량의 원 밖으로 벗어납니다. 하지만 그것이 모든 것을 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And, and defining what your game is, where, where you're going to have an edge is enormouslyimportant.
그리고 자신이 어떤 게임을 하고 있는지, 어디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지를 정의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And I think both my partner Charlie and I have gotten reasonably good at that over the years.
제 파트너 찰리와 저는 세월이 흐르면서 그것을 꽤 잘하게 되었습니다.
[On greed and envy in American business - 미국 비즈니스에서의 탐욕과 질투]
Well, greedy takes the wrong, but I would say envy does it probably as much as anything else.
음, 탐욕이 잘못된 길로 이끌기는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질투가 아마도 그 어떤 것만큼이나 큰 영향을 미칩니다.
I mean, the reason they get greedy is because you sit there during an internet boom or something, and your next-door neighbor, who you know is not as smart as you are, has just bought a new car because he did something he didn't understand, but it worked.
즉, 그들이 탐욕스러워지는 이유는 인터넷 붐과 같은 시기에 당신이 앉아서 지켜보는 동안, 당신보다 똑똑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옆집 이웃이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일을 해서 성공해서 새 차를 샀기 때문입니다.
And you say to yourself, well, you know, I, if he can do it, I can do it.
그러면 당신은 스스로에게 '음, 그가 할 수 있다면, 나도 할 수 있어'라고 말하게 됩니다."
And I'm, I know I'm better than he is,
그리고 저는 제가 그보다 더 낫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or maybe your spouse says to you, you know, what's going on with the Joneses next door? You're smarter than he is, but they're driving newer cars.
또는 당신의 배우자가 '옆집 존스네는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당신이 그보다 더 똑똑한데, 그들은 더 새 차를 몰고 다니네요.'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So envy is, envy is a big, I, I, I ran a firm on Wall Street for a short period of time, and I would pay somebody in their late 20s a couple of million dollars,
그래서 질투는 큰 문제입니다. 저는 월스트리트에서 잠시 동안 회사를 운영했었는데, 20대 후반의 사람에게 몇 백만 달러를 지불했었습니다.
and this is 20 years ago, when a couple of million was even more than now, and they would be fine until they found the guy next to him, you know, got 2.1 million, and then from that point forth, they were unhappy.
이는 20년 전의 일이었고, 그때는 몇 백만 달러가 지금보다 더 큰 가치였습니다. 그들은 옆 사람이 210만 달러를 받았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만족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그들은 불행해졌습니다.
So envy is a terribly destructive, greed, greed and envy get mixed up together, but, and then think about envy, of course, as, as my partner Charlie says of the, of the seven deadly sins.
그래서 질투는 매우 파괴적입니다. 탐욕과 질투는 함께 섞이지만, 제 파트너 찰리가 말하듯이, 질투는 일곱 가지 치명적인 죄 중 하나입니다.
I mean, there's no, there's no upside to it.
즉, 질투에는 아무런 장점이 없습니다.
I mean, you talk about gluttony, and at least it's kind of fun while you're eating, and you can talk about lust, and we know, you know, there's some fun there, but, but envy, you make yourself feel terrible, and the other guy that you're happy with doesn't even feel it.
즉, 폭식에 대해 이야기하면, 적어도 먹는 동안에는 어느 정도 재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욕망에 대해 이야기하면, 우리가 알다시피 거기에도 어느 정도 재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질투는, 당신 스스로를 끔찍하게 만들고, 당신이 질투하는 상대방은 그것을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How making money has shaped his character - 돈을 버는 것이 그의 성격을 어떻게 형성했는가]
Well, it's, it's, it's a game. I mean, it's a, it's a competitive game. It's a big game, and I enjoyed the game a lot.
음, 그것은 일종의 게임입니다. 즉, 그것은 경쟁적인 게임입니다. 큰 게임이죠, 그리고 저는 그 게임을 매우 즐겼습니다.
The money has utility up to a point, but that point was reached probably when I was in my early 30s, you know, beyond that point, money had no utility, but the game was a lot of fun, and the game was continued to be fun, and it does benefit other people.
돈은 어느 정도까지는 유용성이 있지만, 그 지점은 아마도 제가 30대 초반일 때 도달했을 겁니다. 그 이후로는 돈이 더 이상 유용성이 없었지만, 게임은 여전히 매우 재미있었고, 계속해서 재미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됩니다.
But, you know, my, I was born with wiring that in this kind of economy, at this time in our history, I'm going to make a lot of money if I work at it.
하지만, 제 성향은 이런 종류의 경제에서, 우리 역사의 이 시점에서, 열심히 일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게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제 성향은 이런 종류의 경제에서, 우리 역사의 이 시점에서, 열심히 일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게 만들어졌습니다.
You know, it doesn't mean that I'm a superior human being or anything, but, but I wasn't born, you know, so that I can, I can, you know, win dancing with the stars.
그렇다고 제가 더 우월한 인간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댄싱 위드 더 스타즈'에서 우승할 수 있는 그런 재능으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I mean, I can't come in second, or third, or fifth, or tenth. I can come in last.
즉, 저는 2등이나 3등, 5등, 10등도 할 수 없습니다. 저는 꼴등을 할 수 있습니다.
and, you know, it, it, it was pure accident, and, but I was in the right place at the right time with the right wiring if, if you were going to make money, and I realized that at, at some point, and, and I enjoyed it, the game, and it is a game that you don't have to, you know, it's not like being a heavyweight boxer or, you know, or baseball player or something.
그리고, 그것은 순전히 우연이었지만, 저는 돈을 벌기 위해 올바른 시기와 장소에, 올바른 성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시점에서 그것을 깨달았고, 그 게임을 즐겼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헤비급 복서나 야구 선수와는 다릅니다.
I mean, you can play that game a long, long time.
즉, 그 게임은 오랫동안 할 수 있습니다.
[How he was as a child - 어린 시절에 어땠는지]
I wouldn't, I was, I was smart, but I wasn't that smart. You know, I was, I was good at what I ended up doing,
저는, 저는 똑똑했지만, 그렇게 똑똑하지는 않았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결국 하게 된 일에는 능숙했습니다.
but, you know, I got a nickel a week allowance, and, and a nickel a week wasn't enough to satisfy my wants,
하지만, 저는 주당 5센트의 용돈을 받았고, 주당 5센트로는 제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부족했습니다
so I, I went into business very early,
그래서 저는 아주 일찍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and, and I wasn't going to make more than a nickel a week, unless I, unless I started selling Coca-Cola door-to-door, I sold gum door-to-door, or sold Saturday Ink Post, Liberty Magazine, Lady's Home Journal, you name it, and I enjoyed it.
그리고, 저는 주당 5센트 이상을 벌 수 없었기 때문에, 코카콜라를 집집마다 판매하거나, 껌을 집집마다 판매하거나, 새터데이 잉크 포스트, 리버티 매거진, 레이디스 홈 저널 등을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을 즐겼습니다.
[On Omaha - 오마하에 대해]
Well, I like Omaha, but I, I'm comfortable in one of my other places, but because I have friends, a lot of friends,
음, 저는 오마하를 좋아하지만, 다른 곳에서도 편안함을 느낍니다.
I'm particularly on both coasts, and, and, and almost very convenient flying either way.
특히 양쪽 해안에 많은 친구들이 있어서, 어느 쪽으로 날아가도 매우 편리합니다.
I can be almost any place in three hours, and I like to see my friends, and I like, I like action, but I like Omaha.
나는 거의 어떤 곳이든 3시간 안에 갈 수 있고, 친구들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며, 활동적인 것을 좋아하지만, 오마하도 좋아합니다.
It's, you know, I, I, I live five minutes from where I work, and that's been the situation now for, for 53 years,
아시다시피, 저는 일하는 곳에서 5분 거리에 살고 있고, 이런 상황이 53년 동안 지속되고 있습니다.
and, and I work with people that, I mean, a great group of people that make my life very easy, and that take good care of me,
그리고 저는 훌륭한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있는데, 이들은 제 삶을 매우 편하게 만들어주고 저를 잘 돌봐줍니다.
and, and my, my grandchildren went to the same high school that, that my children went to, my wife went to, my dad went to, and my grandfather went to,
그리고 제 손자들은 제 자녀들, 아내, 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가 다녔던 같은 고등학교에 다녔습니다.
same public school, inner city, integrated, been integrated for 75 years,
같은 공립학교로, 도심에 있고, 통합되어 있으며, 75년 동안 통합되어 있었습니다.
Charlie Munger went to the same school, and, so there's a lot of continuity to it.
찰리 멍거도 같은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래서 많은 연속성이 있습니다.
There's a lot of friendships, the medical centers five minutes from the office, and at 84, maybe that's a little more important,
여기에는 많은 친분 관계가 있습니다. 의료 센터는 사무실에서 5분 거리에 있는데, 84세인 저에게는 아마도 그것이 조금 더 중요할 것 같습니다.
and, and I know, you know, I know the doctors, they know me, I, I knew their fathers probably, and so everything, everything works,
그리고 저는 의사들을 알고, 그들도 저를 알며, 아마도 저는 그들의 아버지들도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잘 돌아갑니다.
and, and it's just, it's a pace, it's, it's relationships, continuity that, that I like,
그리고 그것은 단지 생활 리듬이고, 제가 좋아하는 관계와 연속성입니다.
but I, I'm, I'm very happy when I'm other places too, and seeing my friends there.
하지만 저는 다른 곳에 있을 때도 매우 행복하고, 그곳의 친구들을 만나는 것도 좋아합니다.
[His typical day - 그의 일상적인 하루]
Well, on typical day, hey, I don't have any special, special time I get the hours, but normally, I get up a little before seven,
음, 일상적인 하루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특별히 정해진 시간은 없지만, 보통 7시 조금 전에 일어납니다.
I happen to get up at 4.30 this morning, so sometimes I wake up early, and I do a lot of reading then too,
오늘 아침에는 4시 30분에 일어났는데, 가끔 일찍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때도 많은 독서를 합니다.
but, but I'll get up, but I'll read the papers at home some, almost always,
일어나서 거의 항상 집에서 신문을 읽습니다.
so I may get to the office this morning, I happen to get here at 6.30 because I got up very early, and I've read all the papers,
오늘 아침에는 매우 일찍 일어나서 6시 30분에 사무실에 도착했고, 이미 모든 신문을 읽었습니다.
I still got here early, but it doesn't really make any difference, because I can think about the same things at the office,
여전히 일찍 도착했지만, 사실 큰 차이는 없습니다. 사무실에서나 집에서나 같은 것들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or I don't, I have very few appointments, I have, I'm the least scheduled guy you'll find in my position,
저는 약속이 거의 없습니다. 제 위치에 있는 사람 중에서 가장 일정이 없는 사람일 겁니다.
and I like it that way, but I get here to the office, and I've read some of the papers, I read more papers, I read mail,
그리고 저는 그것을 좋아합니다. 사무실에 도착하면 이미 일부 신문을 읽은 상태이고, 더 많은 신문을 읽고 우편물을 확인합니다.
I don't do email myself, but it comes from my assistant, and that keeps it down, and, and I sit and read all that,
저는 직접 이메일을 하지 않지만, 보조원이 처리해 줍니다. 그래서 이메일 양을 줄일 수 있고 앉아서 그 모든 것을 읽습니다.
we don't have any committees at, at Berkshire, we don't have a committee, we don't have a PowerPoint, we don't have any of that sort of thing,
버크셔에는 위원회가 없습니다. 위원회도 없고, 파워포인트도 없고, 그런 종류의 것들이 전혀 없습니다.
we don't have a public relations department, we don't have investor relations, we don't have a general council, we don't have a human relations department,
홍보부도 없고, 투자자 관계부도 없고, 법무팀도 없고, 인사부도 없습니다.
we've got 300 and some thousand employees around the world, and we're probably third or so in market value, maybe fourth in the world,
우리는 전 세계에 30만 명이 넘는 직원이 있고, 아마도 시가총액으로 세계 3위나 4위 정도 될 겁니다.
but, but we just don't go for anything that, that, that people do just as a matter of form,
하지만 우리는 그저 형식적으로 하는 일들은 하지 않습니다.
and I've got, I've got an office I like, and that goes on, and some days I go home at 5, some days I go home at 5.30 or 6,
저는 제가 좋아하는 사무실이 있고, 그곳에서 일합니다. 5시에 퇴근하거나, 5시 30분이나 6시에 퇴근합니다.
and I come down on Saturdays usually, but, but I come down mid-morning maybe, and, and usually go to lunch with somebody in the office,
보통 토요일에도 출근하지만, 아마도 오전 중반쯤 와서 보통 사무실에 있는 누군가와 점심을 먹습니다.
and there'll be four or five people in, and if there's a football game, I may watch it on TV at the office, and I'll watch a lot of football games, or whatever it may be, sports events, maybe in the afternoon,
4-5명 정도가 있을 겁니다. 축구 경기가 있으면 사무실에서 TV로 볼 수도 있고, 저는 많은 축구 경기나 다른 스포츠 경기를 오후에 보기도 합니다.
while at the same time coming through other things, and it's, it's exactly the life I like.
동시에 다른 일들도 처리합니다. 이것이 제가 좋아하는 삶입니다.
[The importance of focus - 집중의 중요성]
I think it was about 1992, shortly after I met Bill Gates, I was out at a, with his parents, and they had some other guests,
1992년쯤이었을 겁니다. 빌 게이츠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의 부모님과 함께 외출했었고, 다른 손님들도 있었습니다.
and Bill's dad asked each of us, and there were probably 20 or so, to write down on a piece of paper, one word that would best describe what had helped us the most,
아마도 20명 정도 있었을 텐데, 빌의 아버지가 우리 각자에게 우리에게 가장 큰 도움을 준 단어 하나를 종이에 적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and Bill and I, without any collaboration at all, each wrote the word focus,
빌과 저는 전혀 협의하지 않았지만, 둘 다 '집중'이라는 단어를 적었습니다.
and, and I would say my partner Charlie Munger is an extreme example of focus, but,
제 파트너인 찰리 멍거는 집중의 극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you know, that's why Tiger Woods hit 10,000 putts too, or, you know, or Roger Fedders, but spending three or four hours a day hitting a golf ball, or some pianist has been spending five hours a day practicing,
타이거 우즈가 10,000번 퍼팅을 했던 이유도, 로저 페더러가 하루에 세네 시간씩 골프공을 치는 것도, 피아니스트가 하루에 다섯 시간씩 연습하는 것도 집중 때문입니다.
I mean, focus is just bearing down on something that, in my case, and I think probably the cases of most people that are reasonably good at what they do, that they enjoy,
즉, 아마도 자신이 하는 일을 잘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우, 그들이 즐기는 것에 전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I mean, you can't, you wouldn't be able to do it if it was work, so it's, it's, it's a natural,
일이었다면 할 수 없을 겁니다. 그래서 그것은 자연스러운 행동입니다.
it is not, it's not, I say to myself, I'm going to focus on this, or do anything,
'이것에 집중해야지' 또는 '이걸 해야지'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는 게 아닙니다.
it's just a natural behavior, and it's, it's been that way ever since I was a kid, but, but kids focus,
그저 자연스러운 행동일 뿐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그래왔습니다. 아이들도 집중합니다.
I mean, you know, the best, the best kid at baseball, and, you know, in eighth grade is, is taking a lot of swings out there,
8학년 때 최고의 야구 선수는 많은 스윙을 하고 있습니다.
or, you know, or he's, I think, Bill Bradley told me I used to shoot baskets five or six hours a day,
빌 브래들리가 저에게 하루에 다섯 시간에서 여섯 시간씩 농구를 했다고 말했습니다.
because he figured some of the guy was doing it four hours a day, but he enjoyed it too,
그는 다른 누군가가 하루에 네 시간씩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도 그것을 즐겼습니다.
and, and I, it's the same way with me, I can't tell you the color of the walls in my bedroom, or my living room, or the color of the carpet in my living room,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침실이나 거실의 벽 색깔, 또는 거실 카펫의 색깔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and at one time, my, when I worked at home, I worked in this little sewing room, sort of, off the bedroom,
한때, 제가 집에서 일할 때, 침실 옆에 있는 작은 재봉실 같은 곳에서 일했습니다.
and, and at one point, my wife put in this wallpaper with this bright red, and had dollar bills on her, or something, she found it someplace,
어느 날 아내가 밝은 빨간색에 달러 지폐가 그려진 벽지를 붙였습니다. 어디선가 그걸 찾아왔더군요.
and a couple years later, I, I said to I said that new wallpaper is terrific, and she said, it's been there a couple years,
그로부터 몇 년 후, 저는 '새 벽지가 멋지네요'라고 말했고, 아내는 '그게 몇 년 전부터 있었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I, I just don't, I don't see things like that, and it, I'm not color blind or anything, but it, it, it, it's just not something that, that grabs me,
저는 그런 것들을 보지 않습니다. 색맹도 아니지만, 그런 것은 저를 사로잡지 않습니다.
and, and on the other hand, I'll remember a number sometimes a long, long time, but, you know, my, like, my partner Charlie Munger would be the same way, I mean, it, I'm, Bill Gates would be the same way,
반면에, 숫자는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습니다. 제 파트너 찰리 멍거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빌 게이츠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I've got a lot of friends that, that, they just, they get, they get so darned interested in what they're, they're working on, they just don't, they don't see other things.
제 친구들 중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너무 몰두해서 다른 것들을 보지 못합니다.
That makes me easy to live with it, some ways, I mean, sort of get away with anything around me.
그 덕분에 저와 함께 사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쉽습니다. 제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눈치채지 못하니까요.
[Lessons from his parents - 부모님으로부터 배운 교훈]
Well, it's very difficult to say. I grew up in a middle-class family, basically.
음, 말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중산층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My dad, well, my dad lost his job in 1931 a year after I was born.
제 아버지는, 제가 태어난 지 1년 후인 1931년에 직장을 잃었습니다.
I lost all his savings, and only the fact that my grand, his father had a grocery store, I kept eating it.
아버지는 모든 저축을 잃었고, 할아버지가 식료품점을 운영했던 덕분에 계속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Nevertheless, my father went on to have another child a year or two later. I mean, he was an optimist.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1~2년 후에 또 다른 아이를 가지셨습니다. 즉, 그는 낙관주의자였습니다.
He, he believed very much in having an inner scorecard, and I never worry about what other people are thinking about you,
그는 내면의 점수표를 가지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고,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전혀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you know, just, just, if you know why you're doing what you're doing, that's good enough.
그저 당신이 왜 당신이 하는 일을 하는지 알고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했습니다.
And he, he read a lot. It was an introvert to some degree.
그리고 그는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어느 정도 내향적인 사람이었습니다.
He liked people, but he, but he also liked just sitting and reading, like talking with, with the kids.
사람들을 좋아했지만, 그냥 앉아서 책을 읽는 것도 좋아했고, 아이들과 이야기하는 것도 좋아했습니다.
And so he was, he was a sensational teacher over the years.
그래서 그는 오랜 세월 동안 훌륭한 선생님이었습니다.
But we were learning, we were learning how he saw life, and it made a lot of sense to us.
우리는 그가 인생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배우고 있었고, 그것은 우리에게 매우 의미 있게 다가왔습니다.
So we started seeing life the same way.
그래서 우리도 같은 방식으로 인생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And he, he always emphasized that it's your inner scorecard that counts.
그는 항상 내면의 점수표가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Don't worry about what the rest of the world thinks.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He was probably a little bit better than that, and he was kids were.
그는 아마도 그가 말한 것보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었고, 아이들도 그랬습니다.
But, but it, it, it sunk in.
하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깊이 스며들었습니다.
My mother was very smart and cared a lot about her children, but she'd had a very, very tough child.
제 어머니는 매우 똑똑하셨고 자녀들을 많이 아끼셨지만, 아주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내셨습니다.
Her mother ended up in a mental institution. One of her sisters joined it.
어머니의 어머니, 즉 제 할머니는 결국 정신 병원에 입원하셨습니다. 어머니의 자매 중 한 명도 그곳에 입원했습니다.
The other sister committed suicide. Her brother, who was a superstar, died at about age 30.
다른 자매는 자살했습니다. 슈퍼스타였던 어머니의 오빠는 30세 즈음에 사망했습니다.
So that she'd had a, she'd had a tough life.
그래서 어머니는 힘든 삶을 살아오셨습니다.
And so she, she was very dutiful about taking care of the kids, but you didn't get the same feeling of, of love.
그래서 아이들을 돌보는 데 매우 충실하셨지만, 같은 수준의 사랑을 느끼기는 어려웠습니다.
It was there, but it just, it didn't come out the same way as with my dad.
사랑은 있었지만, 아버지와 같은 방식으로 표현되지는 않았습니다.
[His mother's migraines - 그의 어머니의 편두통]
She, she, she would have, I think, I think she would have what would be known as migraines now.
어머니는, 지금으로 치면 편두통이라고 불릴 만한 증상을 겪으셨을 것 같습니다.
I don't think they even call them migraines in those days, but she would, she would experience terrific headaches.
그 당시에는 그것을 편두통이라고 부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심한 두통을 겪으셨습니다.
And you didn't want to be around her when she was having the headaches. And she would, she would lash out more.
어머니가 두통을 겪고 있을 때는 주변에 있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더 많이 화를 내셨습니다.
She would never do it in public, but, and my, and she worshiped my dad.
공공장소에서는 절대 그러지 않으셨고, 아버지를 매우 존경하셨습니다.
So, so he was a calming force if he was around, but of course he was, he wasn't around during the day when you were a little kid.
그래서 아버지가 계시면 어머니는 진정하셨지만, 물론 아버지는 제가 어렸을 때 낮 동안에는 집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So, so you, you want to do, you didn't want to be around when my mother had a migraine, but you probably, you know, I could be sympathetic to that.
그래서, 어머니가 편두통이 있을 때는 주변에 있고 싶지 않았지만, 아마도 그것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His mother's concerns on how people viewed their family - 그의 어머니가 사람들이 그들 가족을 어떻게 보는지에 대해 가졌던 걱정]
Well, she certainly was concerned in the sense that she had one exterior, she had one personality, one other people around.
어머니는 확실히 신경 쓰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주변에 있을 때는 하나의 외적 모습, 하나의 성격을 보이셨습니다.
And, and sometimes she had a different personality when they weren't around.
그리고 때때로 다른 사람들이 없을 때는 다른 성격을 보이셨습니다.
I mean, she did not show that other personality when that other people were around,
즉, 다른 사람들이 주변에 있을 때는 그 다른 성격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but I'm not sure how much, you know, I don't know what kind of pain she was actually in,
하지만 얼마나 그랬는지, 그리고 어머니가 실제로 어떤 종류의 고통을 겪고 계셨는지 알지 못합니다.
so it's, it's hard to evaluate precisely, you know, what was the motivation for the, the behavior.
그래서 그 행동의 동기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평가하기가 어렵습니다.
I think it had a lasting impact on all three, I'm sure, but it, it may have helped.
저는 그것이 우리 세 명 모두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확실히 그렇지만, 그것이 도움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I may have compensated in some other ways.
저는 다른 방식으로 보상했을 수도 있습니다.
I mean, I, you know, I've, I've often thought that I've had so much luck in the world that most of the things
즉, 저는 세상에서 너무나 많은 행운을 가졌다고 자주 생각해왔습니다.
I did that were wrong turned out pretty well, including, you know, when I went to a period where I got very rebellious and when I was 13 or so,
제가 잘못했던 대부분의 일들이 결국 꽤 잘 풀렸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13살 즈음에 매우 반항적이었던 시기도 포함해서요.
but I may have compensated by going out and delivering 500 papers a day
하지만 저는 하루에 500부의 신문을 배달하며 그것을 보상했을 수도 있습니다.
and, and if you translate that to the present day every, I made a penny of paper, but in terms of compounding, that penny turned into something else.
그리고 그것을 현재 가치로 환산해보면, 당시에는 신문 한 부당 1센트를 벌었지만, 복리로 계산하면 그 1센트는 다른 무언가로 변했을 것입니다.
[His father was the greatest man he ever knew - 그의 아버지는 그가 아는 가장 위대한 사람이었다.]
Well, I never saw him do anything that you couldn't put on the front page of the paper.
저는 아버지가 신문 1면에 실을 수 없을 만한 일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And, and, and I, uh, uh, no, he was, he was probably the best teacher without attempting to be a teacher, you know, with, with all three of us kids.
그리고 아버지는 의도적으로 가르치려 하지 않으면서도, 우리 세 아이들에게 아마도 최고의 선생님이셨을 것입니다.
So it, it, uh, we all grew up knowing that we had unconditional love from my dad.
그래서 우리 모두는 아버지로부터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자랐습니다.
That doesn't mean he thought we could get away with everything.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가 우리가 모든 것을 해도 된다고 생각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There were times when I felt it was disapproval, but he had a terrific way of showing his disapproval.
때로는 아버지의 반대를 느낄 때도 있었지만, 아버지는 그의 반대를 보여주는 훌륭한 방식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I mean, he just, he would basically, and, and he had plenty of reasons for having disapproval too,
즉, 아버지는 기본적으로, 그리고 반대를 할 충분한 이유도 있었지만,
but he would, he basically would just essentially say, you know, I know you can do better than that.
기본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그것보다 더 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Yeah, there's a whole way of saying it, but, but he didn't, he didn't,
네, 그것을 말하는 전체적인 방식이 있었지만, 아버지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and I don't think I ever hurt him raise his voice, you know, in my lifetime.
제 평생 동안 아버지가 목소리를 높이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And, but, but you knew if he was disappointed with you and,
하지만 아버지가 당신에게 실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and, and that, that, that would have a big effect with all three of us actually, but including me.
그것은 실제로 우리 세 명 모두에게, 저를 포함해서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On pleasing his parents -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것에 대해]
I don't want to please my dad more than I want to please my mother.
저는 어머니보다 아버지를 더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Yeah. Yeah, but I, uh, sure. I mean, I, I think we all did.
네, 맞아요. 제 생각에는 우리 모두가 그랬던 것 같습니다.
And we knew, incidentally, we didn't have to do a lot to do that. We just had to do our best.
그리고 우리는 사실, 그것을 위해 많은 것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저 최선을 다하면 되었습니다.
He never attempted in any way to steer me into any kind of activity.
아버지는 어떤 활동으로 저를 이끌려고 시도한 적이 없었습니다.
He, he encouraged me to go to college when I didn't want to go to college,
제가 대학에 가고 싶지 않았을 때도 대학에 가라고 격려해 주셨지만,
but in terms of whether I was, you know, if it asked him, his preference, he never would have said it to me,
만약 아버지의 선호를 물어봤다면, 아버지는 저에게 말하지 않았겠지만,
but he probably would have liked me to be a preacher or something of a sort, but if,
아마도 저를 목사나 그와 비슷한 무언가로 키우고 싶어 하셨을 것입니다.
but he, he did not try and steer me in any direction and, and, and,
하지만 아버지는 저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and even in terms of, you know, later on in terms of getting married or anything of a sort, he, he was just for me. It's a great feeling.
심지어 나중에 결혼이나 그와 비슷한 것에 있어서도, 아버지는 그저 저를 지지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정말 좋은 느낌이었습니다.
[The Stock Market crash of 1929 - 1929년 주식 시장 붕괴]
Well, uh, because I was, I was born in 1930. I was conceived during the crash.
음, 저는 1930년에 태어났습니다. 주식 시장 붕괴 당시에 제가 잉태되었죠.
So I, I actually owe my existence because my dad was a stock salesman and by November of 1929, when I was conceived, there was no sense calling on people to try and sell them stocks.
그래서 실제로 제 존재는 이런 이유로 가능했습니다. 제 아버지는 주식 판매원이었는데, 제가 잉태된 1929년 11월에는 사람들에게 전화해서 주식을 팔려고 하는 것이 의미가 없었거든요.
So I, I think he was probably just staying home and there wasn't any television in those days.
그래서 아마도 아버지는 그저 집에 계셨을 겁니다. 그 당시에는 텔레비전도 없었고요.
So here I am. So I probably owe my existence to the stock market crash, but my dad, my dad had a heart attack very young around that period.
그래서 제가 여기 있는 겁니다. 아마도 제 존재는 주식 시장 붕괴 덕분일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무렵 매우 젊은 나이에 심장마비를 겪으셨습니다.
I don't know the exact time, but he, he basically felt if you did your best things would work out
정확한 시기는 모르지만, 아버지는 기본적으로 최선을 다하면 모든 것이 잘 될 거라고 믿으셨습니다.
and, and he, uh, the bank where he was working, uh, closed, uh, I think it was the day before his birthday in August 12th in 1931.
그리고 아버지가 일하던 은행이 문을 닫았는데, 아마도 1931년 8월 12일, 아버지의 생일 전날이었던 것 같습니다.
And it, he had what little savings he had in the bank.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얼마 안 되는 저축금도 그 은행에 있었습니다.
He owed $55 a month on a mortgage on, on the house we had.
우리 집 모기지로 매달 55달러를 갚아야 했습니다.
And, uh, but he, you know, I don't know this, but I just know from his behavior subsequently and everything I've heard, he wasn't discouraged.
하지만 아버지는, 제가 직접 알지는 못하지만 이후의 행동과 제가 들은 모든 것으로 볼 때, 낙담하지 않으셨습니다.
I mean, and, and, and, uh, like I say, he went on to have a third child and he just, he worked right through the depression, started his own company because he had no place to go. He couldn't get a job any place.
그리고, 제가 말씀드렸듯이, 아버지는 세 번째 아이를 가졌고 대공황 기간 내내 계속 일하셨습니다. 어디에서도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회사를 시작하셨죠. 어느 곳에서도 일자리를 얻을 수 없었거든요.
So he started his own company, originally called Buffett's Selenica and company.
그래서 자신의 회사를 시작하셨는데, 처음에는 '버핏의 셀레니카 앤 컴퍼니'라고 불렸습니다.
I think Selenica put up a little money because my dad didn't have any.
제 생각에, 제 아버지에게 돈이 없었기 때문에 셀레니카가 약간의 자금을 대준 것 같습니다.
And, uh, that company continued. I eventually went to work with it.
그리고 그 회사는 계속 운영되었습니다. 결국 저는 그 회사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It was always a small company. Never made lots of money.
그 회사는 항상 작은 회사였습니다. 많은 돈을 벌지는 못했습니다.
We never belonged to a country club. We never had a second car, any of that sort of thing. But we always, we lived fine.
우리는 컨트리 클럽에 가입하지 않았고, 두 번째 차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잘 살았습니다.
And, and about 1936, we moved into a Nysher house and, and, uh, uh, it, it was a, it was a middle class sort of living.
그리고 1936년쯤에 우리는 나이셔 하우스로 이사했습니다. 그곳은 중산층 정도의 생활 수준이었죠.
And, and that's what, that's the way he wanted to live.
그리고 그것이 아버지가 원하던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His father's optimism - 그의 아버지의 낙관주의]
I think, I think probably the fact that my dad was optimistic would have had a big effect on me because I admired everything about him.
제 생각에는 아버지의 낙관적인 성격이 저에게 큰 영향을 미쳤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아버지의 모든 면을 존경했거든요.
Uh, so to the extent that I was absorbing lessons from him without knowing it, I probably, uh, I probably came about that.
그래서 제가 모르는 사이에 아버지로부터 교훈을 흡수하고 있었던 만큼, 아마도 저도 그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I don't know how much of being optimistic is, you know, just, I've got every reason to be optimistic.
낙관적인 성격이 얼마나 타고난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저는 낙관적일 모든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For one thing, I've been healthy all my life pretty much despite the fact that I eat like a six year old and I've had terrific friends throughout my life.
우선, 제가 6살 아이처럼 먹는데도 불구하고 평생 건강했습니다. 그리고 제 인생 전반에 걸쳐 훌륭한 친구들이 있었죠.
It'd be kind of hard. If I was anything but optimistic, there'd be something wrong with me.
낙관적이지 않기가 어려웠을 겁니다. 만약 제가 낙관적이지 않다면, 뭔가 잘못된 것일 겁니다.
But I, I do think I certainly being around an opt, optimistic father, uh, uh, he didn't care about money at all.
하지만 저는 확실히 낙관적인 아버지 곁에서 자랐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돈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으셨어요.
I mean, he wanted to have enough money so his family could live fine, but it, it meant nothing to me.
즉, 아버지는 가족이 잘 살 수 있을 만큼의 돈만 있으면 되었고, 그 이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He was kind of entertained by the fact that I liked him.
아버지는 제가 그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재미있어 하셨습니다.
But, but, uh, his optimism reflected itself in the fact that he, he believed that, you know, that all three of his kids would be do terrifically,
하지만, 그의 낙관주의는 모든 자녀들이 훌륭하게 성장할 것이라고 믿는 데서 드러났습니다.
although like I say, the expectations for girls and were entirely different than for boys.
물론, 말씀드렸듯이, 여자아이와 남자아이에 대한 기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But I had no doubt that he thought that I was going to be a huge success.
하지만 아버지는 제가 큰 성공을 거둘 것이라고 확신하고 계셨습니다.
[Warren as a young boy - 어린 소년으로서의 워런]
I was, I was pretty standard. I, I like to read more than most kids.
저는 꽤 평범했습니다. 대부분의 아이들보다 책을 더 좋아했죠.
Uh, and I, uh, I really like to read a lot.
그리고 정말 책을 많이 읽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Uh, my eyesight was bad. I didn't know that for a while,
시력이 좋지 않았어요. 한동안 그 사실을 몰랐지만,
but, uh, it never slowed me down. Uh, but I like, I like sports and I was, I was average.
그것이 저를 늦추지는 않았습니다. 스포츠를 좋아했고 평균적이었습니다.
I never was, I was never good. I was never terrible.
결코 뛰어나지도 않았고, 형편없지도 않았습니다.
So I wouldn't have been, I never would have been the first guy chosen, but I would have been the last guy chosen for basketball or baseball or whatever it might have been.
그래서 저는 첫 번째로 선택되지 않았지만, 농구나 야구,또는 다른 어떤 종목에서도 마지막으로 선택되는 사람은 아니었을 겁니다.
Uh, uh, you know, when the time came, I liked girls and it was a pretty normal that way.
알다시피, 때가 되자 여자아이들을 좋아하게 되었고, 그 점에서는 꽤 정상적이었습니다.
Except we did move to Washington when I was 12 or so, when my dad got elected to Congress
제가 12살쯤 되었을 때, 아버지가 의회에 당선되셔서 우리가 워싱턴으로 이사 갔습니다.
and that disrupted my life and for a period, I was, I was very rebellious after that.
그 일이 제 삶을 혼란스럽게 했고, 그 후 한동안 저는 매우 반항적이었습니다.
I mean, I felt that I was doing fine and all my life, everything was going well
즉, 저는 잘 지내고 있었고, 제 인생은 모든 것이 잘 되고 있었는데,
and, and, uh, and then we moved to a different environment and I, uh, so I, I, uh, I behaved very badly there for a while.
우리는 다른 환경으로 이사하게 되었고, 그래서 저는 한동안 매우 나쁜 행동을 했습니다.
Not too long, but, but, uh, but, uh, long enough to probably cause my parents some worry.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지만, 부모님께 걱정을 끼칠 만큼은 충분히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The rebellous student and son - 반항적인 학생과 아들]
Well, I just, at school, I just lost interest.
글쎄, 나는 그저 학교에서 흥미를 잃었어요.
I mean, I, I, I took pleasure in tormenting my teachers.
선생님들을 괴롭히는 데서 즐거움을 느꼈죠.
I mean, at that time, for example, AT&T was the stock that all teachers own for their retirement, pay $9 a year dividend.
그 당시, 예를 들어 AT&T는 모든 선생님들이 은퇴 자금으로 소유하고 있던 주식이었어요. 연간 9달러의 배당금을 지급했죠.
It was the ultimate safe stock. So the teachers all owned it.
가장 안전한 주식이었어요. 그래서 선생님들 모두가 그 주식을 갖고 있었어요.
So my teachers found me a big pain in the neck, but they did think I knew a lot about stocks.
선생님들은 저를 골칫거리로 여겼지만, 제가 주식에 대해 많이 안다고 생각했어요.
And so I shorted then shares of AT&T and then brought the confirmation to school and showed these teachers that I was shorting the stock they were counting on for their retirement.
그래서 저는 AT&T 주식을 공매도하고 그 확인서를 학교에 가져와서 선생님들에게 보여줬어요. 그들이 은퇴 자금으로 의지하고 있는 주식을 제가 공매도하고 있다는 걸 말이에요.
I was, I was a real pain in the neck for a while.
한동안 저는 정말 골칫거리였어요.
And there was a period, actually, there was one short period where, uh, uh, and I think it was the English class. They actually put me in a special room.
실제로 짧은 기간 동안, 영어 수업이었던 것 같은데, 그들은 저를 특별한 방에 가두었어요.
I was kind of like Hannibal Lecter and they shoved the things in under the door, you know, but that didn't last too long.
마치 한니발 렉터처럼 저를 대했어요. 그들은 문 밑으로 물건들을 밀어 넣었죠. 하지만 그건 오래가지 않았어요.
My, my dad, at one point, just went on for six months. I stole things then.
제 아버지는 한 시점에, 6개월 동안 계속되었는데, 저는 물건들을 훔쳤어요.
I mean, it was, it was, I didn't steal them because I wanted to do. I just stole them because the guys I was hanging out with were stealing things.
그러니까, 제가 원해서 그것들을 훔친 게 아니라, 그저 제가 어울리던 친구들이 물건을 훔치고 있어서 저도 훔쳤을 뿐이에요.
And, and, uh, and I like these fellows and they liked me, but, but my dad at one point said, I, you know, you can do better than this.
그 친구들이 저를 좋아했고 저도 그들을 좋아했지만, 어느 시점에 아버지가 말씀하시길, '넌 이것보다 더 잘할 수 있어'라고 말씀하셨어요.
And, and he may have thrown in the fact that I think you'll have to give up your paper out.
그리고, 아마도 아버지는 '신문 배달 일도 그만둬야 할 것 같다'고 덧붙이셨을 거예요.
So if you keep behaving this way, and so I shaped up.
그러니까 이렇게 계속 행동하면서, 저는 행동을 고쳤어요.
[Running away - 도망치기]
I ran away. Yeah. I, I, when I was at the low point sort of, I, I decided I would run away and I, but I was kind of a coward about it.
저는 도망쳤어요. 네. 제가 힘든 시기에, 도망가기로 결심했지만, 사실 좀 겁쟁이였어요.
So I talked to other guys, John McCray and Roger Belvin, running away with me.
그래서 다른 친구들인 John McCray와 Roger Belvin에게 함께 도망가자고 말했어요.
And, uh, so we, we went out, we got on Wisconsin Avenue out near Western Avenue and we started hitchhiking.
그리고 우리는 나가서 Western Avenue 근처의 Wisconsin Avenue에서 히치하이킹을 시작했어요.
First guy that picked us up, uh, we got in the car three of us hitchhiking
우리를 처음 태워준 사람, 우리 셋이 히치하이킹을 하다가 그의 차에 탔는데,
and, and we asked him, we asked him where he was going. He said, I'm going to hell and you'll want to come along.
우리는 그에게 어디로 가는지 물어봤어요. 그는 '지옥에 가는 중인데, 너희들도 같이 갈래?'라고 말했죠.
And at that point, the whole adventure was sort of tapering out.
그 순간, 우리의 모험은 점점 시들해지고 있었어요.
But, so I got out of there as fast as I could, but we got to Hershey, Pennsylvania.
그래서 저는 최대한 빨리 거기서 빠져나왔고, 우리는 펜실베이니아 주의 허시까지 갔어요.
And, uh, one of the guys had some thoughts about the fact that Hershey was sort of nirvana and we'd go to the Hershey plant.
그리고 한 친구가 허시가 일종의 천국 같은 곳이고 우리가 허시 공장에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They give us free, free Hershey bars. They had an amusement park there.
그들은 우리에게 무료로 허시 초콜릿 바를 줬어요. 그곳에는 놀이공원도 있었어요.
And then we got picked up by the highway patrol in, in, in Pennsylvania. And that scared the hell out of us.
그리고 우리는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고속도로 순찰대에 붙잡혔어요. 그것은 우리를 정말 무섭게 했어요.
They took us down to the highway patrol headquarters and we could hear this teletype in the background.
그들은 우리를 고속도로 순찰대 본부로 데려갔고, 우리는 배경에서 전신 타자기를 들을 수 있었어요.
We just, we were lying to these highway patrolmen about how the fact we had our parents permission and everything.
우리는 고속도로 순찰대원들에게 부모님의 허락을 받았다고 거짓말을 했어요.
And we were afraid that teletype was sending out an all points alert, you know, pick these guys up.
그리고 그 전신 타자기가 '이 사람들을 잡아라'라는 전방위 경고를 보내고 있을까 봐 두려웠어요.
So we got out of Hershey as fast as we could.
그래서 우리는 최대한 빨리 허시에서 빠져나왔어요.
And finally we got back to Washington. Roger Bell's, Roger Bell's father was a congressman too.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워싱턴으로 돌아왔어요. Roger Bell의 아버지도 국회의원이었어요.
And Roger Bell's mother actually was in the hospital.
그리고 Roger Bell의 어머니는 실제로 병원에 입원해 계셨어요.
He cashed in his, his what were then called war bonds, uh, to have the money, uh, to finance his part of things.
그는 당시 '전쟁 채권'이라고 불리던 것을 현금화했어요. 자신의 몫을 충당할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죠.
And, uh, she was, and, and he, I think he wanted to go to Stanton military academy. And I think he ended up winning that.
그리고, 음, 그녀는, 그리고 그는 Stanton 사관학교에 가고 싶어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가 결국 그것을 얻어냈던 것 같아요.
I walked in the door and the first thing my mother was said to me was, how come he came back so soon? Which was a little deflating.
제가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어머니가 제게 처음 하신 말씀은 '어떻게 그렇게 빨리 돌아왔니?'였어요. 그 말씀은 저를 좀 실망시켰죠.
So that was, that was the last time I ran away.
그래서 그게 제가 도망친 마지막 시간이었어요.
[How Warren was with girls - Warren이 여자아이들과 어떻게 지냈는지]
Bad. I, I, um, socially when I left Omaha, I was in eighth grade.
나쁘죠. 저는, 음, 오마하를 떠났을 때 8학년이었어요.
And, uh, I was doing okay socially in Omaha.
그리고 오마하에서는 괜찮았어요.
But when I moved to Washington, they were at a different point sort of in, in, in social development at that point.
하지만 워싱턴으로 이사했을 때, 그들은 사회적 발달 면에서 다른 단계에 있었어요.
And I, I was the youngest one always in the class because I'd skipped.
그리고 저는 항상 반에서 가장 어렸어요, 월반을 했기 때문이죠.
And, uh, uh, so I, uh, I was sort of out of the swing of things there for a while.
그래서 저는 한동안 그곳의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했어요.
I, uh, I went to my sixtieth reunion at Wilson High and there's a girl there, uh, named Barbara weekend.
저는 윌슨 고등학교 60주년 동창회에 갔는데, 거기에 바바라 위켄드라는 여자애가 있었어요.
She's got a married name now, but I took her out one time to the uptown theater in Washington.
지금은 결혼해서 다른 성씨를 갖고 있지만, 제가 한 번 워싱턴의 업타운 극장에 데리고 갔었죠.
And I asked her whether she remember what movie we saw. And she said, no, I don't remember that.
저는 그녀에게 우리가 본 영화가 무엇이었는지 기억하냐고 물었어요. 그녀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어요.
And then she said, but I do remember one thing.
그리고 그녀가 말하길, 하지만 한 가지는 기억한다고 했어요.
And I get the idiot. I said, what was that?
저는 바보같이, '그게 뭐였어요?'라고 물었죠.
And Barbara said, well, you picked me up in her hearse.
그러자 바바라가 말하길, '당신이 나를 영구차(hearse)로 데리러 왔었어요'라고 했어요.
And it was true that I owned a half interest in her hearse when I was in high school,
그리고 제가 고등학교 때 영구차의 절반 지분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에요.
which was not the smoothest thing that, or coolest, as I would say now, the thing that you could, you could do on a date.
지금 생각해보면 데이트할 때 할 수 있는 가장 멋지거나 세련된 일은 아니었죠.
[Working for his grandfather's store - 할아버지의 가게에서 일하기]
Yeah. Well, when I was very young, I was probably only 10 or so at that time, but this was before I moved to Washington.
네. 제가 아주 어렸을 때, 아마 그 당시에는 10살 정도였을 거예요. 하지만 이것은 워싱턴으로 이사 가기 전의 일이에요.
I did work at my grandfather's grocery store.
저는 할아버지의 식료품점에서 일을 했어요.
And there was a, uh, felon and Eddie that was the oldest driver.
그리고 거기에 에디라는 가장 나이 많은 운전사가 있었어요.
We had seven trucks at seven orange trucks at the grocery store.
우리 식료품점에는 7대의 오렌지색 트럭이 있었어요.
It was a credit and delivery store.
그곳은 외상과 배달을 하는 가게였어요.
And so I would be his helper and people would phone in their orders.
그래서 저는 에디의 조수가 되어 사람들이 전화로 주문한 물건들을 받았어요.
And then I would load the truck in reverse order of, of how we were going to deliver it.
그리고 나서 저는 우리가 배달할 순서의 역순으로 트럭에 물건을 실었어요.
And Eddie would tell me how to load the truck.
에디는 제게 트럭에 어떻게 물건을 실어야 하는지 알려주었죠.
So I went out with him the first day I'd loaded the truck, like he said, and we started out and our first stop was in Benson.
그래서 제가 처음으로 에디가 말한 대로 트럭에 물건을 실은 날, 우리는 출발했고 첫 번째 정류장은 벤슨이었어요.
And then we went up for our second stop was in Dundee. And then we went back to Benson, which was a couple of miles away again.
그리고 우리의 두 번째 정류장인 던디로 올라갔어요. 그런 다음 우리는 다시 몇 마일 떨어진 벤슨으로 돌아갔어요.
Then we went to central. And then we went back to Benson again.
그 다음엔 센트럴로 갔어요. 그리고 또다시 벤슨으로 돌아갔어요.
And I couldn't take it after a while.
저는 한동안 그걸 참을 수가 없었어요.
I said, Eddie, you know, I'm only 10, but, but this is the craziest route I've ever seen.
저는 말했어요, '에디, 나 아직 10살밖에 안 됐지만, 이건 내가 본 가장 말도 안 되는 경로예요.'
I said, let me redesign this and we can get this done with half the mileage.
그래서 제가 말했어요, '이 경로를 다시 설계하면 주행 거리를 절반으로 줄일 수 있어요.'
And then he gave me this disgusted look. And I thought Eddie was 120.
그러자 에디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어요. 저는 에디가 120살쯤 된 줄 알았어요.
Then he was probably about 10 years younger than I am now.
하지만 그는 아마 지금의 저보다 10살 정도 어렸을 거예요.
But Eddie gave me this look and he said, Warren, don't you understand?
에디는 저를 보며 말했어요, '워렌, 이해 못 하겠니?'
He said, Mrs. Call is the best looking woman on the route. And if we get there early enough, she may not be dressed.
그는 말했어요, '콜 부인은 이 경로에서 가장 예쁜 여자야. 우리가 충분히 일찍 도착하면 그녀가 옷을 입지 않았을 수도 있어.'
And he said, and then Mrs. Code is the second best looking. And if we get there
그리고 그는 말했어요, '코드 부인은 두 번째로 예쁜 여자야.'" 그리고 우리가 거기 도착하면...
그리고 그는 말했어요, '코드 부인은 두 번째로 예쁜 여자야.' 그리고 우리가 거기 도착하면..."
and I felt so sorry for this woman. It was last on the route. I mean, my definition, she was in bad shape.
저는 그 여자가 너무 불쌍했어요. 그녀는 배달 경로의 마지막이었어요. 제가 보기에 그녀는 상태가 좋지 않았어요.
But I learned a little bit about business then, and sometimes how the employees' interests can differ from those of the employer.
하지만 그때 저는 사업에 대해 조금 배웠고, 때로는 직원들의 이해관계가 고용주의 이해관계와 다를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어요.
[On being competitive as a child - 어린 시절 경쟁적이었던 것에 대하여]
I've always been competitive, but sometimes it doesn't pay to be competitive if you're in the wrong game.
저는 항상 경쟁적이었지만, 잘못된 게임에는 경쟁적인 것이 도움이 되지 않을 때도 있어요.
I was in a one boxing match when I was about 10 or something like that.
제가 10살 정도였을 때 복싱 시합에 나간 적이 있어요.
And after the first round, I don't think I could lift the gloves.
첫 라운드가 끝난 후, 저는 글러브를 들어올릴 수 없었던 것 같아요.
But fortunately, the other guy was in the same position to make much difference.
하지만 다행히도, 상대방도 비슷한 상황이어서 큰 차이는 없었어요.
[What his family was like growing up - ]
It wasn't, it was not a formal household. And a good bit of the time it was a happy household.
우리 집은 형식적인 가정은 아니었어요. 대부분의 시간에는 행복한 가정이었지만,
And some of the times it wasn't. But most of the time it wasn't.
때로는 그렇지 않았어요.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에는 그렇지 않았어요.
And we did, there was a lot of, there was a lot of entertaining in the home in those days.
그 시절에는 집에서 많은 사람들을 초대해서 즐겁게 보냈어요.
I mean, nobody had much money. So there were bridge clubs, for example.
예를 들어, 다들 돈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브리지 클럽 같은 모임이 있었어요.
And I always, I always did very well with older people.
저는 항상 나이 많은 사람들과 잘 어울렸어요.
I mean, I liked my dad, my dad's friends.
저는 아버지의 친구들을 좋아했어요.
And then I used to walk over to a church for choir practice.
그리고 저는 합창 연습을 위해 교회까지 걸어가곤 했어요.
I was in a kid's choir when I was 10 or 11.
10살이나 11살 때 어린이 합창단에 있었어요.
And on the way back, I'd always stop at about 10 houses and talk to various housewives.
돌아오는 길에는 항상 10집 정도 들러서 여러 주부들과 이야기를 나누곤 했어요.
I knew through my, through my mother and my dad.
그분들은 제 어머니와 아버지를 통해 알게 된 분들이었죠.
And, and there was a lot of sociability.
그리고 사교 활동이 많았어요.
And we had, we had a ping-pong table in the basement.
우리 집 지하실에는 탁구대가 있었어요.
And all, all of the, all of my dad's friends that would come over, they'd all take me on and ping-pong.
아버지의 모든 친구들이 우리 집에 오면, 그들은 모두 저와 탁구를 치곤 했어요.
I was reasonably good at that.
저는 탁구를 꽤 잘 쳤어요.
And there was a lot of that sort of thing.
그런 종류의 활동이 많았어요.
So it was, there was a lot of sociability that way that didn't cost any money, basically.
그래서 기본적으로 돈이 들지 않는 사교 활동이 많았어요.
And it was, we had a good time. There was a lot of singing.
우리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요. 노래를 부르는 일도 많았어요.
We had a little organ that my mother played.
우리 집에는 어머니가 연주하시던 작은 오르간이 있었어요.
My dad and mother were both quite religious. And so it was mostly, well, it was almost exclusively church hymns.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매우 종교적이셨어요. 그래서 대부분, 아니 거의 전적으로 교회 찬송가를 불렀죠.
So I still know the words to some of those old church hymns.
그래서 저는 아직도 그 옛날 교회 찬송가의 가사를 몇 개 기억하고 있어요.
[Growing up and religion - 성장과 종교]
It didn't have much effect on me. I, I was, I was in the kid's choir at Dundee Presbyterian Church.
그것이 저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어요. 저는 던디 장로교회의 어린이 합창단에 있었어요.
And I actually, my wife and I taught a Sunday school right there, the class right after we got married for a while.
실제로 제 아내와 저는 결혼 직후 한동안 그 교회에서 주일학교를 가르쳤어요.
And then I think one of the people in one of the other classes heard too much laughter coming out of our class.
그러다가 다른 반의 누군가가 우리 반에서 너무 많은 웃음소리가 들린다고 한 것 같아요.
We were having a very good time.
우리는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어요.
And so I think they decided that they could use a new, new faculty at that point.
그래서 그들은 새로운 교사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College - 대학]
I didn't want to go to college. I was, I was 16 when I got out of high school.
저는 대학에 가고 싶지 않았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저는 16살이었어요.
I was making about, I probably was making $150 a month or something like that, delivering papers, which only took a couple hours in the morning.
신문 배달을 하면서 한 달에 약 150달러 정도 벌고 있었어요, 아마 그 정도였을 거예요. 아침에 몇 시간만 일하면 됐거든요.
I had this half interest in a pinball machine route with a buddy of mine.
저는 친구와 함께 핀볼 기계 경로의 절반 지분을 가지고 있었어요.
I liked to go to the horse races and handicapped horses.
말 경주를 보러 가고 경주마를 분석하는 것을 좋아했어요.
And I really felt that I didn't really need much more than that.
그리고 저는 그 이상이 필요하지 않다고 느꼈어요.
I was buying stocks. I mean, I read the Wall Street Journal every day and I did a lot of charting of stocks and that sort of thing then.
저는 주식을 사고 있었어요. 저는 매일 월스트리트 저널을 읽었고 주식 차트를 많이 분석하는 등의 일을 했어요.
And I was having, I actually was having a pretty good time and I didn't see that it really was much to be gained by going to college, but my dad kind of jollied me into it.
그리고 저는 실제로 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대학에 가서 얻을 것이 많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아버지께서 저를 설득하셨죠.
And I think he probably, they didn't have essay, at least we didn't use SATs in those days, but I think he probably would have taken the test for me if need be.
그 당시에는 SAT 시험이 없었거나 적어도 우리는 사용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아마도 아버지께서는 필요하다면 제 대신 시험을 치르셨을 거예요.
So he suggested that I apply to the Wharton School of the University of Pennsylvania.
그래서 아버지는 제게 펜실베니아 대학교의 와튼 스쿨에 지원해보라고 제안하셨어요.
And if I didn't like it, I could quit.
그리고 만약 제가 그곳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만둘 수 있다고 하셨죠.
And the year went by and I got very good grades in college.
그렇게 1년이 지나갔고 저는 대학에서 아주 좋은 성적을 받았어요.
I mean, my grades improved as I went along in school.
제 성적은 학교 생활을 하면서 점점 좋아졌어요.
But I didn't feel I was learning that much there because I had mostly graduate students as professors and they were just staying in a chapter ahead of me in the book.
하지만 저는 그곳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고 느끼지 못했어요. 대부분 대학원생들이 교수였고, 그들은 책에서 저보다 한 장 앞서 있을 뿐이었거든요.
So I asked my dad if I could quit then.
그래서 저는 아버지께 그만둬도 되는지 물어봤어요.
And he said, well, give it another year.
아버지는 '음, 1년만 더 해보렴'이라고 하셨어요.
So I gave it another year and still felt the same way.
그래서 저는 1년을 더 다녔지만 여전히 같은 생각이었어요.
So he said, well, do what you want to do.
그러자 아버지는 '그래,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라고 말씀하셨어요.
So I actually transferred to the University of Nebraska and that way I finished in three years because I had enough credits that I could get out in three years and I was in a hurry. I wanted to get out.
그래서 저는 실제로 네브라스카 대학교로 편입했고, 그렇게 해서 3년 만에 졸업할 수 있었어요. 제가 충분한 학점을 가지고 있어서 3년 만에 졸업할 수 있었고, 저는 서둘러 졸업하고 싶었거든요.
I'm doing a disservice to those schools because I did learn a fair amount there.
제가 그 학교들에 대해 부당하게 말한 것 같네요. 왜냐하면 저는 그곳에서 상당히 많은 것을 배웠거든요.
And I would say that the University of Nebraska actually, my year there, I learned fully as much as I was learning at Wharton, which had a much bigger reputation.
그리고 저는 네브라스카 대학교에서 보낸 1년 동안, 더 큰 명성을 가진 와튼 스쿨에서 배운 것만큼 많이 배웠다고 말할 수 있어요.
[Graduate school - Graduate school]
One day, I was reading the Daily Nebraska, which was the college newspaper.
어느 날, 저는 대학 신문인 데일리 네브라스카를 읽고 있었어요.
And it said in Room 300 or something at three o'clock, they're going to award the scholarship of $500 to go to a graduate school of your choice.
그리고 신문에는 300호실인가 그런 곳에서 오후 3시에 당신이 선택한 대학원에 갈 수 있는 500달러의 장학금을 수여한다고 적혀 있었어요.
So I showed up there and I was the only guy that showed up and these professors wanted to keep waiting for other people to show up.
그래서 저는 그곳에 갔는데, 제가 유일하게 나타난 사람이었어요. 교수들은 다른 사람들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싶어 했죠.
I said, wait a second. It said three o'clock. So I got the scholarship unopposed and I applied to the Harvard Business School.
저는 '잠깐만요. 3시라고 했잖아요'라고 말했어요. 그래서 저는 경쟁 없이 장학금을 받았고, 하버드 경영대학원에 지원했어요.
My dad was suggesting that to me. Anything my dad wanted me to do in the end, I usually went along with.
아버지께서 그곳을 제안하셨어요. 아버지는 제가 하기를 원하는 것은 대부분 따랐줬어요.
He never pushed me hard, but if I knew he wanted me to do something, I was very inclined to go along.
아버지는 절대 저를 강하게 밀어붙이지 않으셨지만, 제가 아버지가 원하시는 것을 알면 그것을 따르는 경향이 있었죠.
So I applied and then I went to, they told me to go to Chicago to get interviewed by this fellow that ran a country day school near Chicago.
그래서 저는 지원했고, 그들은 제게 시카고 근처의 한 컨트리 데이 스쿨을 운영하는 사람에게 인터뷰를 받으러 시카고에 가라고 했어요.
So I got on Berlick to train, rode for 10 hours to Chicago, and then I got another little interurban train, rode up to this day school.
그래서 저는 벌릭 열차를 타고 10시간 동안 시카고로 갔고, 그 다음 작은 도시 간 열차를 타고 그 데이 스쿨로 갔어요.
The guy interviewed me for about 10 minutes and he basically said, find something else.
그 사람은 저를 약 10분 동안 인터뷰했고, '다른 곳을 찾아보세요'라고 말했어요.
So I reversed the process, spent 10 or 12 hours getting back thinking, what am I going to tell my dad?
그래서 저는 10시간에서 12시간 정도 돌아오면서 아버지께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고민했어요.
And it all worked out because they did turn me down, but then I was at the University of Omaha that summer and I was leafing through a catalog of other schools
그런데 모든 게 잘 해결됐어요. 왜냐하면 그들이 저를 거절했지만, 그 여름 오마하 대학에 있을 때 다른 학교들의 카탈로그를 훑어보고 있었거든요.
because I did have this $500 that they were going to give me from Nebraska to go to graduate school.
네브라스카에서 대학원에 갈 수 있도록 500달러를 주기로 했었으니까요.
And I saw these names of Graham and Dodd who had written this masterpiece of a book in 1934 and it was now 1950.
그리고 저는 1934년에 이 걸작 책을 쓴 그레이엄과 도드의 이름을 보게 되었어요. 그때는 1950년이었죠.
And I had no idea that they were teaching it or anything.
그리고 저는 그들이 그것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어요.
And I saw that Dave Dodd was the assistant or associate dean, I think it was at Columbia.
그리고 데이브 도드가 콜롬비아 대학의 부학장이나 부교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So I wrote him a letter and I think it was probably August by then
그래서 저는 그에게 편지를 썼어요. 아마도 그때가 8월쯤이었을 거예요.
and I said, Dear Dean Dodd, I thought you guys were dead, but now that I know you're alive, I'd really like to come study under you.
'존경하는 도드 학장님, 저는 당신들이 돌아가신 줄 알았어요. 하지만 이제 당신들이 살아계신 것을 알게 되었으니, 정말 당신 밑에서 공부하고 싶습니다.'라고 썼어요.
And so he got me in and he turned out to be a wonderful, wonderful friend.
그래서 그는 저를 받아주셨고, 결국 훌륭하고 멋진 친구가 되어주셨어요.
I mean, he would take me to dinner there and he treated me like a son.
그는 저를 저녁 식사에 데려가기도 하고 아들처럼 대해 주셨어요.
It was a marvelous experience.
그것은 정말 멋진 경험이었죠.
[Dale Camegie - 데일 카네기]
While I actually, when I was at Columbia, I had been terrified of public speaking all of the time prior.
사실, 제가 콜롬비아에 있을 때, 그 이전까지는 대중 연설에 대해 완전히 겁을 먹고 있었어요.
Well, I don't want to start it. It must have started.
글쎄요, 그것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네요. 아마 시작되었을 거예요.
Maybe I had some terrible experience.
어쩌면 제가 어떤 끔찍한 경험을 했었나 봐요.
I can't remember, you know, in grade school, but I was terrified. I couldn't do it. I'd throw up.
초등학교 때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저는 정말 겁에 질려 있었어요. 할 수가 없었어요. 구토를 했죠.
And so I avoided classes where I would be expected to do that.
그래서 발표를 해야 하는 수업은 피했어요.
And I was, I was fine if I wasn't on stage. I mean, I could, I did a lot of talking otherwise.
무대 위에만 서지 않으면 괜찮았어요. 다른 상황에서는 말을 많이 할 수 있었거든요.
But, so when I was at Columbia, I saw an ad for a Dale Carnegie course in Midtown, New York.
그래서 콜롬비아에 있을 때, 뉴욕 미드타운에서 하는 데일 카네기 강좌 광고를 봤어요.
And I went down and I wrote a check to take the course.
그래서 가서 수강료를 지불하고 등록했어요.
And then right, right after I got up this little apartment, I was paying 10 bucks a month for it on Claremont Avenue.
그리고 바로 그 후에, 클레어몬트 가에 있는 작은 아파트로 올라갔어요. 월세가 10달러였죠.
I stopped payment on the check and I just didn't have the guts to go through with it.
그래서 저는 수표 결제를 중지하고, 그 과정을 끝까지 해낼 용기가 없었어요.
And then when I got out of school, I came back to Omaha.
그리고 학교를 졸업한 후 오마하로 돌아왔어요.
I'm now 20 years old. I'm going to sell stocks to people that are 50 or 60.
이제 저는 20살이었어요. 50세나 60세의 사람들에게 주식을 팔려고 했죠.
And I didn't even look 20.
하지만 저는 20살로도 보이지 않았어요.
And I just knew I had to be able to get so I could speak in front of people better.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더 잘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어요.
So I, again, I saw an ad that at the Rome Hotel here in Omaha on 16th Street, that they were going to have a Dale Carnegie course.
다시 한 번, 오마하의 16번가에 있는 로마 호텔에서 데일 카네기 강좌를 한다는 광고를 봤어요.
And I went down.
그래서 내려갔어요.
And I found I'm Wally Keenan, who later became a very good friend and a partner in my investment partnership, but who I never met before, was the teacher.
그리고 저는 나중에 좋은 친구이자 제 투자 파트너가 된 월리 키넌을 만났어요. 그는 그때까지 한 번도 만나본 적 없었지만, 그 강좌의 강사였어요.
And I handed him $100 in cash.
그래서 저는 그에게 현금 100달러를 건넸어요.
And if I parted with $100 in cash, I knew I was going to follow through.
현금 100달러를 건넸으니, 반드시 끝까지 해낼 거라는 걸 알았죠.
So we took that Dale Carnegie course.
그래서 우리는 데일 카네기 강좌를 들었어요.
And there were about 30 of us.
우리 반에는 약 30명이 있었어요.
And we couldn't say our own name in public at the start.
처음에는 공공장소에서 자기 이름조차 말할 수 없었어요.
They made us do all these crazy things to get out of ourselves.
그들은 우리가 자신을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온갖 이상한 일들을 하게 했어요.
And so we stood on tables and did all kinds of things.
그래서 우리는 테이블 위에 서서 온갖 일을 했어요.
And it worked.
그리고 효과가 있었어요.
And as soon as I got out of that class, I went right out the University of Omaha and said, I want to start teaching
그 수업을 마치자마자, 저는 바로 오마하 대학으로 가서 '강의를 시작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어요.
because I want to get in front of people and force myself to keep doing it.
사람들 앞에 서서 계속 말할 수 있도록 저를 강제하고 싶었거든요.
And that's why I can't stop talking now.
그래서 지금은 말을 멈출 수가 없네요.
It was during the class, incidentally, they gave a pencil every week for the person who'd done the most with what they'd learned the week before.
그 수업 중에, 매주 전 주에 배운 것을 가장 잘 활용한 사람에게 연필을 주었어요.
And during that class, I proposed to my wife to be and she accepted.
그 수업 기간 동안, 저는 제 아내가 될 사람에게 청혼했고 그녀가 받아들였어요.
So when I told that story the following week, when we met, I won the pencil.
그래서 다음 주 수업에서 그 이야기를 했고, 저는 연필을 받았죠.
[On Susie - 수지]
Well, she was 19 when we got married. I was 21.
우리가 결혼했을 때 그녀는 19살이었어요. 저는 21살이었죠.
But she was so much more mature than I was. There's no comparison.
하지만 그녀는 저보다 훨씬 더 성숙했어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죠.
And she really put me back together.
그녀는 정말로 저를 다시 만들어 주었어요.
I was very good at a lot of things, I mean, in terms of business for my age.
저는 제 나이에 비해 사업적인 면에서 많은 것들을 잘했어요.
But on the other hand, I was kind of a lopsided character.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저는 좀 편향된 성격이었죠.
I'm still lopsided in some ways, but now I'm lopsided in ways I like.
어떤 면에서는 아직도 편향되어 있지만, 이제는 제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편향되어 있어요.
And in those days, I was lopsided in some ways I didn't like.
그 당시에는 제가 좋아하지 않는 방식으로 편향되어 있었죠.
So she really put me together. She was there with a little watering can, putting and pouring it on me.
그래서 그녀가 정말로 저를 만들어 주었어요. 그녀는 작은 물뿌리개를 들고 저에게 물을 주듯이 저를 돌봐주었죠.
And she's responsible for, well, I would have accomplished nothing without her.
그리고 그녀는, 글쎄요, 그녀 없이는 저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을 거예요.
I mean, she was incredibly empathetic.
그녀는 정말 공감 능력이 뛰어났어요.
And everybody, she was non-judgmental.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그녀는 비판적이지 않았어요.
It wasn't that she didn't have standards, but she just was non-judgmental about people.
그녀에게 기준이 없었다는 게 아니라, 그저 사람들에 대해 판단하지 않았어요.
And she felt every person, again, was the moral equivalent of every other person.
그리고 그녀는 모든 사람이 도덕적으로 동등하다고 느꼈어요.
She was interested in every person individually.
그녀는 개개인에게 관심이 있었죠.
We once went to a football game in Seattle.
우리는 한번 시애틀에서 축구 경기를 봤어요.
University of Washington was playing Nebraska.
워싱턴 대학이 네브라스카와 경기를 하고 있었죠.
And at halftime, I went down to get a hot dog and a Coke. And she went with me.
그리고 하프타임에 저는 핫도그와 콜라를 사러 내려갔어요. 그녀도 저와 함께 갔죠.
And there was a line of about four people there. And I got in line.
거기에는 약 네 명의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줄을 섰어요.
And five minutes later, I had my Coke and my hot dog in hand.
그리고 5분 후, 저는 콜라와 핫도그를 들고 있었어요.
And I went back. And she was waiting a few feet away.
그리고 돌아왔죠. 그녀는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And there was a woman standing next to her.
그리고 그녀 옆에 한 여자가 서 있었어요.
And this woman was, at that point, was saying, now, I've never told this to anybody else in my life.
그 여자는 그 시점에 이렇게 말하고 있었어요, '저는 이걸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어요.'
This is the one, you know, that woman was not there when I went to get the hot dog.
이게 바로, 그러니까 제가 핫도그를 사러 갔을 때는 그 여자가 거기 없었어요.
People just, they opened up to her.
사람들은 그냥, 그녀에게 마음을 열었어요.
She had more people, probably, that considered her their best friend than anybody I've ever known.
아마도 그녀를 가장 친한 친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제가 아는 누구보다도 많았을 거예요.
[Warren as a young husband - 젊은 남편으로서의 워렌]
Well, I was, I was very focused. I was into my work big time.
글쎄요, 저는 매우 집중적이었어요. 저는 일에 완전히 빠져 있었죠.
And so I, she did most of the work by far of bringing up the children, which was probably a good thing.
그래서 저는, 그녀가 아이들을 키우는 대부분의 일을 했어요. 아마도 그게 좋은 일이었을 거예요.
They have more of her qualities than mine, which I would recommend.
아이들은 제 특성보다는 그녀의 특성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데, 저는 그게 좋다고 생각해요.
[After his father's death -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I told my dad, leave me out of his will.
저는 아버지께 유언장에서 저를 빼달라고 말씀드렸어요.
I don't need the money.
돈이 필요하지 않았거든요.
I'm going to, you know, I knew I was going to give rich. So I told him just to have my sisters.
저는, 그러니까, 제가 부자가 될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아버지께 그냥 제 자매들에게 주시라고 말씀드렸죠.
So I was a trustee for my mother and then subsequently for my sisters.
그래서 저는 어머니의 재산 관리인이 되었고, 나중에는 자매들의 재산 관리인이 되었어요.
But, but no, I was not, I didn't, I did not become the central figure in the family at all.
하지만, 아니요, 저는 가족의 중심 인물이 되지는 않았어요.
My politics became more overt after my dad died.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제 정치적 견해가 더 분명해졌어요.
But, you know, he died at age 60. So he was young. I was 33 at the time.
하지만, 그러니까, 아버지는 60세에 돌아가셨어요. 젊으셨죠. 그때 제 나이는 33살이었어요.
But I don't, my life didn't change dramatically.
하지만 제 삶이 극적으로 바뀌지는 않았어요.
We, we incidentally, I mean, we lived here in Omaha. We lived a block and a half from Susie's parents.
우리는, 그러니까, 우리는 여기 오마하에 살았어요. 수지의 부모님 집에서 1블록 반 떨어진 곳에 살았어요.
And we lived about two miles from my parents.
그리고 우리는 부모님 댁에서 약 2마일 떨어진 곳에 살았어요.
So the whole family was pretty much here in Omaha, including aunts and some aunts, aunts and uncle.
그래서 가족 전체가 오마하에 거의 다 있었어요, 이모와 삼촌도 포함해서요.
[His parenting style - 그의 양육 방식]
I was not much of a discipline American.
저는 규율을 잘 지키는 미국인은 아니었어요.
I, I tried. I didn't, it wasn't a question of trying. It was just natural.
노력은 했어요. 노력의 문제는 아니었어요. 그냥 자연스러운 거였죠.
But I, I, I tried to behave with my kids like my dad had behaved with me.
하지만 저는 아이들에게 아버지가 저에게 했던 것처럼 행동하려고 노력했어요.
I mean, I never tried to steer them in anything because I, I, I just cherished the fact that my dad had supported me so much in anything I did.
그러니까, 저는 아이들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려고 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아버지가 제가 하는 모든 것을 많이 지지해 주셨다는 사실을 소중히 여겼거든요.
So I've got three very different kids and they've got a common heart, which they got from their mother.
그래서 저는 아주 다른 세 아이를 두었지만, 그들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공통된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But they, but I have never felt that it was important that they come into Berkshire Hathaway or that they do what I do.
하지만 저는 그들이 버크셔 해서웨이에 들어오거나 제가 하는 일을 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That's crazy. You know, I mean, they, they're each one have individual talents.
그건 말도 안 돼요. 그러니까, 그들은 각자 개별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어요.
And I certainly wouldn't want to try and take up what they do.
그리고 저는 그들이 하는 일을 따라 하려고 하지 않을 거예요
I've got one son that farms. I'm not much for manual labor.
제 아들 중 한 명은 농사를 짓고 있어요. 저는 육체 노동을 잘하지 않아요.
But so why should they do what I do? I mean, it's never made any sense to me.
그러니까 왜 그들이 제가 하는 일을 해야 하죠? 그건 저에게 전혀 말이 되지 않아요.
So I, I have, I'm sure I brought to the raising of kids what I thought were the better parts of, without doing it consciously, but what I thought were the better parts of the way I was raised.
그래서 저는, 제가 아이들을 키우는 데 있어서, 의식적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제가 자라온 방식 중에서 더 나은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가져왔다고 확신해요.
[His relationship with Susie - 수지와의 관계]
It worked well, but I don't think it'll work for lots of other people necessarily, but it worked very well.
저에게는 잘 통했지만,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반드시 잘 통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저에게는 매우 잘 통했어요.
I mean, we loved each other and we, and we both, we not only loved each other, we admired each other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 사랑했고, 우리 둘 다, 우리는 서로 사랑했을 뿐만 아니라 서로를 존경했어요.
and, and, and we were totally in sync with what the other was doing, but we were two different individuals.
그리고 우리는 상대방이 하는 일에 대해 완전히 공감했지만, 우리는 두 명의 서로 다른 개인이었어요.
[The transition to becoming empty-nesters - 빈 둥지 부모가 되는 과정(자녀들이 모두 독립하고 집을 떠난 후 부모만 남게 되는 전환기)]
It wasn't hard for me.
저에게는 어렵지 않았어요.
I mean, they, they, they were still part of our lives.
그러니까, 그들은, 그들은 여전히 우리 삶의 일부였어요.
They just, you want them to do that. So that was not hard for me.
그들은 단지, 당신이 그들이 그렇게 하기를 원하는 거죠. 그래서 저에게는 어렵지 않았어요.
[A view on life - 삶에 대한 관점]
It goes back to that.
그것은 그 말로 돌아가요.
It was at Oscar Hammerstein, you know, that bell's not a bell, so you ring it a song.
오스카 해머스타인의 말처럼, 종은 울리기 전까지는 종이 아니고, 노래는 부르기 전까지는 노래가 아니죠.
It's not a song till you sing it.
노래는 부르기 전까지는 노래가 아니에요.
Love in the heart isn't put there to stay. Love isn't loved till you give it away.
마음속의 사랑은 그저 머물러 있으라고 넣어둔 게 아니에요. 사랑은 나눠주기 전까지는 사랑이 아니에요.
It's, it's a very strange thing. Love, you can't get rid of it.
그것은, 그것은 아주 이상한 것이에요. 사랑은, 당신이 없앨 수 없어요.
If you, if you try to give it, how would you get more back? If you try to hang on to it, you lose it.
만약 당신이 그것을 주려고 하면, 어떻게 더 많이 돌려받을 수 있을까요? 만약 당신이 그것을 붙잡으려고 하면, 당신은 그것을 잃어요.
It's, it's, it's something like, there may be other things like that, but I can't think what they are.
그것은 뭔가 다른 것들과 비슷할 수 있지만, 저는 그것들이 무엇인지 생각나지 않아요.
Understanding about human behavior and all of that, if, if you're observant at all, and you've had a long lifetime
인간의 행동과 그런 모든 것에 대한 이해는, 만약 당신이 조금이라도 관찰력이 있고,
and you had all kinds of experiences, you, you learn a lot about, about human behavior.
오랜 인생을 살았으며 모든 종류의 경험을 했다면, 당신은 인간의 행동에 대해 많이 배우게 돼요.
[Recovering from Susie's death - 수지의 죽음 이후의 회복 과정]
I think you recover, how do you recover from your, how did I recover from my dad's death or anybody else that, you know, or just a good friend that died, a very good friend a week ago
저는 당신이 회복한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당신의 상실에서 회복하는지, 제가 어떻게 아버지의 죽음에서 회복했는지, 또는 당신이 아는 다른 누군가나, 일주일 전에 돌아가신 아주 좋은 친구로부터 어떻게 회복하는지,
that, you know, you go on, but that Susie spent lots, she spent more time probably with dying people than, about anybody that wasn't in the medical profession.
당신은 계속 살아가지만, 수지는 많은 시간을, 아마도 의료 전문가가 아닌 사람 중에서는 가장 많은 시간을 죽어가는 사람들과 보냈어요.
I mean, she helped people die and, and she helped my friend Jo Rose
그러니까, 그녀는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도왔고, 그리고 그녀는 제 친구 조 로즈를 도왔어요.
and feel there was a man, he was one of my heroes, one of her heroes too, and he lived to be in the high 90s.
그리고 한 남자가 있었는데, 그는 제 영웅 중 한 명이었고, 그녀의 영웅 중 한 명이기도 했어요. 그는 90대 후반까지 살았어요.
He was a marvelous man, I mean, he's a real model for anybody and,
그는 훌륭한 사람이었어요. 그러니까, 그는 누구에게나 진정한 본보기였어요.
but by the time he died, I mean, he had no wife, no child anymore
하지만 그가 죽을 때쯤에는, 그러니까, 그는 더 이상 아내도, 자녀도 없었어요.
and, and she was there when he died and she, she did that for dozens of people.
그리고 그녀는 그가 죽을 때 그 자리에 있었고, 그녀는 수십 명의 사람들을 위해 그렇게 했어요.
[On remarrying - 재혼에 대해]
Well, Ostrand has lived with me for a long time and, and you know, Susie put me together, Ostrand kept me together
오스트랜드는 오랫동안 저와 함께 살았고, 그리고 알다시피, 수지가 저를 일으켜 세웠고, 오스트랜드는 저를 계속 지탱해 주었어요.
and she'd been doing it ever since and she, she takes care of me like nobody else could take care of me
그녀는 그 이후로 계속 그렇게 해왔고, 그녀는 아무도 저를 돌볼 수 없는 방식으로 저를 돌봐주었어요.
and, and not just physically, I don't mean that, I mean, just in all ways.
단지 신체적으로만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요.
[On playing bridge - 브리지 게임에 대해]
Well, it's just, it's, it's, it's the best mental game I know,
음, 그것은 제가 아는 최고의 정신적 게임이에요.
aside from business, which I think it's kind of an interesting mental game too,
사업을 제외하면, 그것도 꽤 흥미로운 정신적 게임이라고 생각하지만,
but it's, you know, you're, you're gonna play a hand every seven or eight minutes
알다시피, 당신은 매 7~8분마다 한 번씩 손을 플레이하게 될 거예요.
and you are going to be facing something where every hand you played in the past has got some utility in evaluating the president,
그리고 과거에 플레이했던 모든 손이 현재를 평가하는 데 어느 정도 유용성을 가지고 있지만,
but you'll never play the same hand twice.
동일한 손을 두 번 플레이할 수는 없어요
You're playing it with a partner, so it's a game where partnership dynamics are very important.
당신은 파트너와 함께 게임을 하므로, 파트너십 역학이 매우 중요한 게임이에요.
It's a game where every card played, you can draw or every bid made or not made or every card played or not played, you can draw inferences from,
이 게임에서는 플레이된 모든 카드, 또는 이루어진 모든 비드나 이루어지지 않은 비드, 또는 플레이된 카드나 플레이되지 않은 카드로부터 추론을 할 수 있어요.
so it is, I regard it as absolutely the most fascinating game there is,
그래서 저는 이것을 가장 매력적인 게임이라고 생각해요.
I'm not that good at it, but, and I think that I can't think of a better form of mental exercise
저는 그렇게 잘하지는 못하지만, 더 나은 형태의 정신 운동은 생각할 수 없어요.
and, you know, I hope I'm playing it when I'm 100 years old.
그리고 저는 100살이 되어서도 이 게임을 하고 있기를 바라요.
I probably spend at least 10 hours a week playing bridge on the computer and, and I enjoy every minute of it.
저는 아마도 일주일에 최소 10시간을 컴퓨터로 브리지를 하며 보내고, 그 모든 순간을 즐기고 있어요.
[On being frugal - 검소하게 사는 것에 대해]
I, I'm not frugal in the sense, I buy anything I want, I buy,
저는 검소하다는 의미에서 그렇지 않아요. 제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사요.
and if I could, if I thought it was, if I thought I would enjoy a $200 dinner better than a hamburger, I get it, one of the, I'd buy it,
만약 200달러짜리 저녁 식사가 햄버거보다 더 즐겁다고 생각한다면, 저는 그걸 사죠.
but I, on Sunday, I frequently take out my children, grandchildren, and great-grandchildren,
일요일에는 자주 제 자녀들, 손주들, 그리고 증손주들을 데리고 나가요.
I've got nine great-grandchildren and seven of them live in this area,
저는 9명의 증손주가 있는데, 그 중 7명이 이 지역에 살고 있어요.
and we go to Dairy Queen, we don't go to Dairy Queen because Berkshire owns it,
우리는 데어리 퀸에 가요. 우리가 데어리 퀸에 가는 이유는 버크셔가 소유하고 있어서가 아니에요.
we don't go to Dairy Queen because it doesn't, you don't run up a big bill,
또한 비용이 많이 들지 않아서 가는 것도 아니에요.
we go to Dairy Queen because I'd rather eat their food than anybody else's and the rest of them do too.
우리가 데어리 퀸에 가는 이유는 제가 그곳의 음식을 다른 어떤 곳보다 더 좋아하고, 나머지 가족들도 그렇기 때문이에요.
So I, I have never, maybe one, you know, go back to when I was 15 or something, but basically I've never denied myself anything I wanted
그래서 저는, 아마도 15살 때로 돌아가면 한 번 정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기본적으로 제가 원하는 것을 한 번도 거부한 적이 없어요.
and the plane is very useful to me and it makes, it enables me to do things that I wouldn't be able to do otherwise and, and it's a lot more comfortable
비행기는 저에게 매우 유용하고, 그것 덕분에 다른 방법으로는 할 수 없는 일들을 할 수 있게 되죠. 그리고 훨씬 더 편안해요.
and, you know, so it doesn't make any difference what it costs because money has no meaning to me anymore,
그래서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돈은 이제 저에게 더 이상 의미가 없거든요.
so if, if something costs me a million dollars and I'm going to really get something out of it, I'll do it,
만약 어떤 것이 백만 달러가 들더라도 제가 정말로 그것에서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면, 저는 그렇게 할 거예요.
but there's very, very, I can't think of what, you know, money doesn't, certainly doesn't buy love, it'll buy sex, you know, by, by recognition,
하지만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많아요. 돈으로 사랑을 살 수는 없죠. 성관계는 살 수 있겠지만요. 인정을 살 수도 있어요.
you know, you, you write, you can get a, you can, you can get your name out of building if you want, I'll write a big enough check,
충분히 큰 수표를 쓰면 건물에 당신의 이름을 올릴 수도 있죠.
but there's no way you can buy love, it can, it can buy testimonial speeches,
하지만 사랑을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어요. 돈으로 찬사 연설은 살 수 있지만요.
but so most things, very few things that require money, a plane requires money,
돈이 필요한 것들은 매우 적어요. 비행기는 돈이 필요하죠.
so that, but I could have multiple houses, but my life would be worse rather than better,
저는 여러 채의 집을 가질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제 삶이 더 나아지기보다는 더 나빠질 거예요.
I have all kinds of friends that have multiple houses and, you know, basically they become like a, you know, hotel manager,
저는 여러 채의 집을 가진 많은 친구들이 있는데, 기본적으로 그들은 호텔 매니저처럼 되어버려요.
you know, and they have to plan what people want, you know, I don't, I don't want to do all that.
그들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계획해야 하죠. 저는 그런 걸 하고 싶지 않아요.
[On family and money - 가족과 돈에 대해]
Well, my wife and I, first wife, Susie, when we were in our 20s talked about what we do with money,
음, 제 아내 수지와 저는 20대 때 돈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I kept telling her we'd make a lot of, I'd make a lot of money, and she humored me,
저는 계속해서 그녀에게 우리가 많은 돈을, 제가 많은 돈을 벌 것이라고 말했고, 그녀는 저를 받아주었어요.
she didn't really care, and, and, and whether she believed me or not, she believed me on things generally, so she probably believed me,
그녀는 정말 신경 쓰지 않았죠. 그리고 그녀가 저를 믿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일반적으로 제 말을 믿었기 때문에 아마도 믿었을 거예요.
but it didn't really make that much difference,
하지만 그것은 그다지 큰 차이를 만들지 않았어요.
but it did make a difference what we were going to do with the money after we made it,
그러나 우리가 돈을 번 후에 그 돈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는 중요했어요.
so we actually set up a foundation over 50 years ago, I just looked back at the records and the other day, and I think we set it up in 1964,
그래서 우리는 실제로 50년 전에 재단을 설립했어요. 저는 최근에 기록을 다시 살펴봤는데, 1964년에 설립한 것 같아요.
and we always said we were going to give a, if I made a lot of money, which I was convinced I would,
우리는 항상 제가 많은 돈을 벌면, 그리고 저는 그럴 것이라고 확신했죠,
that we would end up giving it, we'd, we'd have everything we wanted,
결국 그것을 기부할 것이라고 말했어요.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겠지만,
but, but, and we would leave our children, originally the idea was enough so they could do anything,
우리 아이들에게는 원래 그들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만큼은 주되,
but not enough so they could do nothing.
아무것도 하지 않을 만큼 많이 주지는 않겠다는 생각이었어요.
That was a line that actually Catherine Graham gave to me, but it makes a lot of sense,
그것은 실제로 캐서린 그레이엄이 저에게 준 말이었지만, 매우 이치에 맞는 말이에요.
I mean, if you're very wealthy, you know, it's crazy to, you know, have your kids out there in, in rags or something of the sort, but it's also crazy to have them, so they never have to lift a finger the rest of their life,
즉, 만약 당신이 매우 부유하다면, 아이들을 누더기를 입힌 채로 내보내는 것은 미친 짓이지만, 그들이 평생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되게 하는 것도 미친 짓이죠.
so, so over time we've given them, we gave them some money, but in, in my entire lifetime, everything that I've spent, my wife spent, and my kids have spent that came from me will be quite a bit less than 1% of everything I make,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그들에게 약간의 돈을 주었지만, 제 평생 동안 제가 쓰고, 제 아내가 쓰고, 제 아이들이 쓴 모든 것 중 제게서 나온 돈은 제가 번 전체의 1% 미만일 거예요.
the other 99% plus will, will go to others because it has no utility to me, and it, and my kids have all they need,
나머지 99% 이상은 다른 사람들에게 갈 거예요. 그것은 저에게 아무런 효용이 없고, 제 아이들은 이미 그들이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they each run a foundation which I fund, and they do a terrific job doing it,
그들은 각자 제가 자금을 대는 재단을 운영하고 있고, 그들은 그 일을 훌륭하게 해내고 있어요.
and they each in their own way, they do it, and they work hard at it, and they live pretty much normal lives,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그 일을 하고, 열심히 일하며, 꽤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어요.
I mean, they, they are not, they're not driving, driving around, I, I gave them probably, I don't know how many years ago, five or ten years ago, I gave them, I started giving them a few hours on the plane,
그들은 미친 듯이 돈을 쓰고 다니지 않아요. 5년 전인지 10년 전인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들에게 비행기를 몇 시간 사용할 수 있게 해주기 시작했어요.
but not, not, not enough, so they could, so they could go crazy on it, but,
하지만 그들이 미칠 정도로 많이 사용할 수 있을 만큼은 아니었죠.
so I've, I've softened up some on that, but I, I, I, I couldn't be more pleased with how the whole subject of money has worked out in our family.
그래서 저는 그 부분에 대해 조금 완화했지만, 우리 가족에서 돈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었는지에 대해 더 기쁠 수가 없어요.
[On Susie running the foundation - 수지가 재단을 운영하는 것에 대해]
I thought I would pile it up over the years, and I would be sort of a compounding machine to build up a whole lot of money,
저는 수년간 돈을 쌓아올리고, 일종의 복리 기계가 되어 엄청난 돈을 모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and that, and she would unpile it in terms of running a, one very large foundation,
그리고 아내가 하나의 매우 큰 재단을 운영하면서 그 돈을 풀어낼 것이라고 생각했죠.
and she was younger, just a couple years younger than I was, but, and women live longer, so I thought the odds were very good that she would disperse it,
그녀는 저보다 몇 살 어렸고, 여성들이 더 오래 살기 때문에 그녀가 그 돈을 분배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했어요.
and that it would be much better to give away many, many billions later on than give away a few millions early on,
초기에 몇백만 달러를 기부하는 것보다 나중에 수십억 달러를 기부하는 것이 훨씬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and that I was particularly good at compounding money, and therefore society would benefit by waiting,
저는 특히 돈을 불리는 데 능했기 때문에, 기다리는 것이 사회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and she didn't want to wait as much as I did, but she never quite appreciated compounding like I did,
그녀는 저만큼 기다리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복리의 힘을 저만큼 이해하지는 못했어요.
so it, it worked out, and she, she, she died ten years ago, and, and so I had to change my plans, and, but that was the, that would have been the original, that was the original plan,
그래서 그렇게 진행되었고, 그녀는 10년 전에 세상을 떠났어요. 그래서 저는 계획을 바꿔야 했지만, 그것이 원래 계획이었죠.
and she did run the foundation for a long time, and she gave away significant money,
그녀는 오랫동안 재단을 운영했고 상당한 돈을 기부했어요.
but, and, and when she died, I'd given her $22,000 over the first few years of our marriage, just because I thought she ought to have it in her own name,
우리가 결혼한 첫 몇 년 동안 저는 그녀에게 22,000달러를 주었는데, 그녀 이름으로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and she left a $3 billion estate, and, and 97 or so percent, 98 percent of that money went to the foundation,
그녀가 죽었을 때 30억 달러의 재산을 남겼고, 그 돈의 97%에서 98%가 재단으로 갔어요.
and so we always figured that the money could do a lot of good, and that a lot of money could do possibly a whole lot more good,
우리는 항상 그 돈이 많은 선을 할 수 있고, 많은 돈이 아마도 훨씬 더 많은 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and that she was better at giving away money than I would be, and I was better at piling enough that she would be,
그리고 그녀가 저보다 돈을 기부하는 데 더 능숙하고, 제가 돈을 모으는 데 더 능숙하다고 생각했죠.
so the whole thing made sense to both of us.
그래서 우리 둘 다에게 이 모든 것이 이치에 맞았어요.
[Giving the money to other foundations - 다른 재단들에 돈을 기부하는 것에 대해]
I'm giving it to five foundations, and the Gates Foundation is the largest,
저는 다섯 개의 재단에 기부하고 있어요. 그 중 게이츠 재단이 가장 큰 규모죠.
but the money's gotten to a scale where it, very few operations could really handle it,
하지만 돈의 규모가 너무 커져서 실제로 그것을 다룰 수 있는 운영 체제가 거의 없어요.
but I doubled the amount that I give to each one of the three children's foundations,
그러나 저는 세 자녀의 재단 각각에 주는 금액을 두 배로 늘렸어요.
so they're getting the present prices for Berkshire, they're getting close to 100, I don't know, 125 or 100, probably closer to 150 million of stock a year,
그들은 현재 버크셔 주식 가격으로 연간 약 100억에서 125억,
and they got to keep spending it.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계속 써야 해요.
Then there's the Susan Buffett Foundation, which was originally, we had intended to be the whole thing,
그리고 수잔 버핏 재단이 있는데, 원래는 우리가 전체를 의도했던 재단이에요.
that's the one we set up 50 years ago, and that's got quite a bit more money in,
50년 전에 설립한 재단이죠. 이 재단에는 상당히 많은 돈이 들어있어요.
and then the largest is the Gates Foundation, who have the same feeling that I do that every human life is of equal value,
그리고 가장 큰 재단은 게이츠 재단이에요. 그들은 모든 인간의 삶이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는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and so I feel very good about what's being done with the money.
그래서 저는 그 돈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에 대해 매우 만족스럽게 생각해요.
The money has no utility to me, it can't make me happier, can't make me, you know, in any way, and probably can make me miserable if I had to certain things with it,
그 돈은 저에게 아무런 효용이 없어요. 저를 더 행복하게 만들 수 없고, 어떤 식으로든 저를 더 나아지게 할 수 없어요. 오히려 그 돈으로 특정한 일들을 해야 한다면 아마도 저를 불행하게 만들 수 있을 거예요.
and it has utility to other people if properly used, so I've got a solution that fits exactly the objectives that we started with 60 years ago or so.
하지만 적절하게 사용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효용이 있죠. 그래서 저는 60년 전쯤 우리가 시작했던 목표에 정확히 맞는 해결책을 찾았어요.
I'm a wholesaler in a sense, in terms of giving it away,
저는 돈을 기부하는 데 있어서 일종의 도매상이라고 할 수 있어요.
but I've got an older sister Doris, who owns a Sunshine Lady,
하지만 제게는 도리스라는 누나가 있는데, 그녀는 선샤인 레이디라는 재단을 소유하고 있어요.
and she spends all day, every day, giving away money at retail, and she's done a terrific job at it,
그녀는 매일 하루 종일 소매로 돈을 나눠주는 일을 하고 있죠. 그녀는 그 일을 정말 훌륭하게 해내고 있어요.
and I send her all the letters I get, and she looks into each individual case,
저는 제가 받는 모든 편지를 그녀에게 보내요. 그러면 그녀는 각각의 개별 사례를 살펴보죠.
she doesn't give money to each individual case, but she evaluates them, and she helps people,
모든 개별 사례에 돈을 주지는 않지만, 그들을 평가하고 도와줘요.
and she gives them, you know, she's their friend too, in addition to small checks that she give out,
그리고 그녀는 작은 금액의 수표를 주는 것 외에도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기도 해요.
but you can't get rid of the money that I've got doing that.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는 제가 가진 돈을 다 없앨 수는 없어요.
I love the fact she does it, and I support her in a small way,
저는 그녀가 그 일을 한다는 사실을 정말 좋아하고, 작은 방식으로 그녀를 지원해요.
but I have to do things at scale,
하지만 저는 대규모로 일을 해야 해요
and having a solution that, where I feel good about the people, feel good about what's being done, and has the ability to do big things, makes me, yeah, that's exactly what I intended the money to do all along.
그리고 해결책을 가지고 있다는 것, 즉 제가 사람들에 대해 좋게 느끼고, 진행되는 일에 대해 좋게 느끼며, 큰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해결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저를, 그래요, 그것이 바로 제가 처음부터 이 돈으로 하고자 했던 정확히 그것이에요.
[What people will view him as -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
Both, probably, because Bill and I and Melinda have worked on developing the giving pledge,
아마도 둘 다일 것 같아요. 빌과 저, 그리고 멀린다가 기부 서약(Giving Pledge)을 개발하는 데 함께 노력했기 때문이죠.
I think actually that will be, I think that will have quite an impact over the decades,
실제로 이것이 앞으로 수십 년 동안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해요.
I think 50 years from now, the giving pledge will be looked at as a really important move,
50년 후에는 기부 서약이 정말 중요한 움직임으로 여겨질 것이고,
and will affect the level of philanthropy, particularly by the very wealthy in this country,
특히 이 나라의 매우 부유한 사람들의 자선 수준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봐요.
so I think that will be a factor,
그래서 그것이 하나의 요인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and I hope that Berkshire Hathaway is something that people study in terms of a business operation.
그리고 저는 버크셔 해서웨이가 사업 운영의 측면에서 사람들이 연구하는 대상이 되기를 바랍니다.
[The Giving Pledge - 기부 서약]
Very wealthy people, very, just like very poor people, very in their emotions and motivations and everything,
매우 부유한 사람들은, 매우 가난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감정과 동기, 그리고 모든 면에서 매우 다양합니다.
but one problem that they have, they often have, is that they don't have many peers to talk to when you get into the question of their children, for example, or war philanthropy or whatever it may be,
하지만 그들이 자주 겪는 한 가지 문제는 자녀 문제나 자선 활동 등에 대해 이야기할 동료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they may have a lawyer they talk to, but they don't just want to go out and talk to anybody about it,
그들은 변호사와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저 아무나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는 않습니다.
so Bill and I have found in the giving pledge that when we open up the conversation, they really like to talk,
빌과 저는 기부 서약을 통해 대화의 장을 열었을 때 그들이 정말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and the first meeting we had, we asked David Rockefeller if he would host in New York City, and he was very gracious about it, and put together a group of, well,
우리가 첫 모임을 가졌을 때, 데이비드 록펠러에게 뉴욕시에서 주최해 달라고 부탁했고, 그는 매우 친절하게 응해주었습니다.
we put together the group, he held the dinner of 15 or 20 people, and I started by asking one couple that were there, and these were all very well-known names, and I said, you know, tell me about how you came about your philosophy of giving,
15-20명 정도의 그룹을 모았고, 저는 한 부부에게 그들의 기부 철학에 대해 물어보면서 시작했습니다.
well, we went around that table, and it was a couple of hours later before people finished talking,
우리는 그 테이블을 돌았고, 몇 시간이 지나서야 사람들이 이야기를 마쳤습니다.
they wanted to talk about it, but it wasn't something they were going to talk about neighborhood,
그들은 이야기하고 싶어 했지만, 이웃이나 다른 곳에서 이야기할 주제는 아니었습니다.
you know, or anything of the sort, and many of them had different, over the years, I mean, as we talked to more people, they have all different kinds of family situations,
우리가 더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들은 모두 다른 종류의 가족 상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and some of them have been very disappointed with their kids, and some of them feel terrific, and some of them find the kids want the money, and others, the kids want philanthropy,
어떤 이들은 자녀들에 대해 매우 실망했고, 어떤 이들은 매우 좋아했습니다. 어떤 자녀들은 돈을 원하고, 다른 자녀들은 자선 활동을 원했습니다.
and but from that came the idea that we might develop something in the way of both being smarter about philanthropy, and getting people perhaps engaged in a younger and in a bigger way by organizing an entity that would focus on that,
이로부터 우리는 자선 활동에 대해 더 현명해지고, 사람들이 더 젊은 나이에, 더 큰 규모로 참여하도록 하는 조직을 만들어야겠다는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and so the giving pledge came out of that, and there was a need for it,
그래서 기부 서약이 탄생했고, 이에 대한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I mean, it is, it isn't that it's changed the behavior of loads of people,
기부 서약이 많은 사람들의 행동을 바꾸지는 않았습니다.
most of the people overwhelmingly in the giving pledge were philanthropically inclined beforehand, they were going to do it,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전부터 자선 활동에 관심이 있었고, 그렇게 할 예정이었습니다.
I think some of them are doing it sooner, I think some of them are doing it bigger,
하지만 저는 일부는 더 빨리, 일부는 더 크게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and in a few cases, and they've told me, and in fact I've got letters at the office, they've told me that it really did change how they thought about things,
몇몇 경우에는, 그들이 저에게 말해주었고 실제로 제 사무실에 편지도 보냈는데, 이것이 정말로 그들의 생각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that clarified their own thinking,
그들의 생각을 명확히 해주었다고 합니다.
had one case where the one of the parents was somewhat reluctant to do it,
한 경우에는 부모 중 한 명이 약간 꺼려했는데,
and the kids talked them into doing it,
자녀들이 설득해서 하게 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which was remarkable, and I think it's done wonders in a family when that happens.
이는 정말 놀라운 일이었고,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가족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The formula for making money - 돈을 버는 공식]
Well, the big answer is you're in the right place if you're in America,
음, 큰 답변은 당신이 미국에 있다면 당신은 올바른 장소에 있다는 것입니다.
and you don't have to be particularly smart, you just have to be patient,
그리고 특별히 똑똑할 필요는 없고, 단지 인내심만 있으면 됩니다.
and the biggest thing in making money is time,
돈을 버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입니다.
and I've had this long run, and so the compounding at the end turns into very big numbers,
저는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해왔고, 그래서 마지막에 복리 효과가 매우 큰 숫자로 나타나게 됩니다.
but if you would, well, the start of the 20th century, the Dow Jones average was 66, and it ended at 11,400,
20세기 초에 다우존스 평균지수는 66이었고, 세기 말에는 11,400으로 끝났습니다.
and that was with the Great Depression, and world wars, and flu epidemics, and everything else,
이는 대공황, 세계 대전, 독감 유행병, 그리고 다른 모든 일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랬습니다.
so you've got a tailwind in this country if you just own a cross-section of it.
그래서 당신이 이 나라의 횡단면만 소유하고 있어도 당신은 순풍을 타고 있는 것입니다.
One big thing is keeping down expenses, and the other thing is not trying to pick one stock, but owning a large group of stocks, and buying it over time, and then just sitting, and paying no attention to people who say they know when to buy and sell stocks, or buy and sell this individual stock,
큰 비용을 절감하는 것이 중요하고, 한 주식을 고르려 하지 말고, 다양한 주식을 소유하고, 시간을 두고 매수한 후, 주식을 언제 사고 팔아야 하는지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말을 무시하고 그냥 앉아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so it's a very simple game where the person who doesn't try to do very much usually does better than the person who spends a lot more energy on it.
이는 매우 간단한 게임으로, 많은 에너지를 쓰지 않는 사람이 더 많은 에너지를 쓰는 사람보다 보통 더 잘합니다.
[On Berkshire Hathaway turning fifty - 버크셔 해서웨이가 50주년을 맞이한 것에 대해]
It's been 50 years since May 10th, 1965, that I formally took control of Berkshire Hathaway.
1965년 5월 10일 제가 공식적으로 버크셔 해서웨이의 통제권을 잡은 지 50년이 되었습니다.
It was done through a partnership that I ran, and a bunch of people that joined me,
이는 제가 운영하던 파트너십을 통해 이루어졌고, 많은 사람들이 저와 함께했습니다.
and I ran the money, and started as a textile company with Doom to Fail,
제가 자금을 운용했고, 실패할 운명이었던 섬유 회사로 시작했습니다.
and step by step, and we've created something that is kind of what I dreamt we might create over time,
그리고 단계적으로,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제가 꿈꿨던 것과 비슷한 무언가를 만들어냈습니다.
but it took a lot of time to do it.
하지만 그렇게 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Never seemed like we were making that progress, much progress on any one day, but compound interest works.
우리는 어느 날 큰 진전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지만, 복리 효과는 작용합니다.
[A system that works - 효과적인 시스템]
How can you look at a country?
어떻게 나라를 바라볼 수 있을까요?
Just anybody watching this, if they walk out their door and think of what was there in 1776,
이 영상을 보는 누구든지 문 밖으로 나가서 1776년에 무엇이 있었는지 생각해 보세요.
it was a bunch of trees, there wasn't anything here, and 4 million people, the first census in 1790 is under 4 million people,
그때는 나무들만 있었고, 아무것도 없었어요. 1790년 첫 번째 인구 조사에서는 인구가 400만 명도 되지 않았습니다.
and we ended up a few hundred years later with 25% of the world GDP.
몇 백 년 후, 우리는 세계 GDP의 25%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Now, something's working, and it isn't because we're a lot smarter than we were then, or that we're working harder,
무언가가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그때보다 훨씬 더 똑똑해서도, 더 열심히 일해서도 아닙니다.
we're not working as hard, but we've got a system that really, really works.
우리는 예전만큼 열심히 일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정말로, 정말로 잘 작동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습니다.
It doesn't work for everybody, and that's something to remember,
이 시스템이 모든 사람에게 작동하는 것은 아니며, 이는 기억해야 할 점입니다.
but in terms of overall output, it has worked since 1776,
하지만 전체적인 산출물 측면에서 보면, 1776년 이후로 계속 작동해왔고,
and it'll keep working better and better over the years, not in a straight line.
앞으로도 점점 더 잘 작동할 것입니다. 물론 이는 직선적인 과정은 아닙니다.
Some fits and starts to it, but this system will turn out more and better goods per capita year after year.
어떤 시행착오가 있기는 하지만, 이 시스템은 해마다 1인당 더 많고 더 나은 상품을 생산해낼 것입니다.
In my lifetime alone, one guy, it's gone up 6 for 1 in terms of real GDP per capita since I was born in 1930,
제 일생만 놓고 봐도, 한 사람의 관점에서, 제가 1930년에 태어난 이후로 1인당 실질 GDP가 6배나 증가했습니다.
and I was born into a pretty good country then, but you can't stop America.
그때도 저는 꽤 좋은 나라에서 태어났지만, 미국의 발전은 멈출 수 없습니다.
You probably can't stop the world. The world is learning the lessons of China 40 years ago or so,
아마도 세계의 발전을 멈출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세계는 약 40년 전 중국의 교훈을 배우고 있습니다.
decided to modify their system in a way that unleashed the potential of that population, which, before that, had not moved there. They were just as smart as we were.
중국은 그들의 시스템을 수정하여 인구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그 이전에는 그런 잠재력이 발휘되지 않았었죠. 그들은 우리만큼 똑똑했습니다.
They worked just as hard, but they weren't getting the results, but now they're going like gangbusters.
그들은 똑같이 열심히 일했지만, 그 결과를 얻지 못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엄청난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